종일/덤덤한 벽에 얼굴을 달아 줍니다//조금씩 일그러진 표정, 떠나간 얼굴들 모두//세 가닥의 전선 두 개의 나사에 묶이죠/면벽은 구도적이에요 무표정하려는 경향입니다//평면의 사원에 플롯을 재구성합니다 단다와 달다/그리고 달 것이다, 는 시점의 문제//콘센트마다 한 사람이 꽂혀 충전되기를 바라는 것이 종교가 될 수 있을까요//밤새 시효 지난 꿈을 고정하는/두 개 무표정한 나사를 알고 있어요//낯익은 설비공이 변기를 놓고 물소리를 흘려 봅니다/버릴 것들이 많은 수도승처럼/모두를 대표해 울어 주는 수도꼭지처럼//나는 멀었습니다 면벽 뒤엔 신발을 고쳐 신고/플러그에 딸린 티브이처럼 채널이 많습니다 //전체이자 부분, 면벽은/끄고 켤 수 없어야 하며/누구에게서나 벽이어야 합니까

「아돌프, 내가 해롭습니까」(2023, 시인의 일요일) 전문



시집 해설을 읽고 시인의 직업이 전기공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왜 그의 시에서 전기공인 화자가 자꾸만 등장하는지를 알고 나니, 이 시의 화자 역시 시인의 페르소나임이 짐작되었다. 그렇다고 이 시가 노동 현장을 대상으로 그의 일상을 단순히 재현했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전기공으로서의 작업이 머릿속에 어느 정도는 그려진다. 노동자인 화자는 “세 가닥의 전선 두 개의 나사에 묶”인 콘센트를 벽에 설치 중이다. 그는 이 작업을 “덤덤한 벽에 얼굴을 달아”준다고 표현한다. 왜 하필 얼굴인 걸까? 가령 들뢰즈는 인간과 동물이 구분되는 지점이 ‘얼굴’이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개인(personal)은 연극에서 사용하는 가면(persona)에서 왔다. 다시 말해 얼굴은 인간의 영혼이 물질화한 것으로, 우리가 타인을 인식하는 것은 그의 얼굴을 인식했다는 말과도 같다. 따라서 벽에 얼굴을 달아준다는 말은 시인의 작업이 타자를 들여놓는 행위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단절과 불통을 상징하는 벽을 앞에 두고 작업하는 이 전기공은 벽을 “평면의 사원”이라 일컫는다. 벽이 구도의 공간이자 장소이므로 덤덤한 벽에 “조금씩 일그러진 표정, 떠나간 얼굴들”을 달아준다는 표현과, “콘센트마다 한 사람이 꽂혀 충전되기를 바라는 것이 종교가 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은 상통한다. 결국 전기공인 화자가 쓰는 시는 사물을 충전해주는 콘센트처럼, 누군가의 일그러진 표정이 펴지거나 떠나간 이가 기운을 차리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도에 해당한다.

하지만 시인은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멀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가 지향하는 삶은 “버릴 것들이 많은 수도승처럼” 염결(廉潔)하고, “플러그에 딸린 티브이처럼” 복잡한 내면을 갖지 않은, 해서 “모두를 대표해 울어 주는 수도꼭지”와도 같은 순전한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마지막에 이렇게 질문한다. 면벽은 “누구에게서나 벽이어야 합니까?” 대답하고 싶으나, 대답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신상조(문학평론가)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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