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 김진영

주말 오후 카페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낸다. 한곳에서 중년의 여자들이 모여서 수다를 즐긴다. 가끔씩 섹스라는 단어가 건너온다. 저편 원탁에는 남자들이 모여서 정치 얘기를 한다. 모두들 등산복을 입었다. 다른 곳 테이블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자주 건너온다. 나는 그냥 거리 풍경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오후의 햇빛, 부드러운 바람, 달리는 자동차, 자전거 타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의미의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순간도 영원도 아닌 어쩌면 그 모두인 저무는 휴일 오후의 시간. 생이 농익어가는 셀러브레이션의 시간. 뫼르소의 시간. 니체의 시간―아 여기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

「아침의 피아노」(2018, 한겨레출판)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푸른 잎들은 꽃보다 아름답다. 꽃이 만개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들지 않던 생각이다. 꽃을 보내고 잎을 맞으며 하는 생각이니 간사하다면 간사하다. 김진영의 저 ‘주말 오후 카페테라스에서 시간’ 역시 평범하고도 아름답다. 축제(‘셀러브레이션’)이거나, 어제나 다름없는 오늘(‘뫼르소’), 철학과 예술과 종교가 어울린(‘니체’) 시간이다. ‘그냥 오후의 햇빛’, ‘그냥 흘러가는 시간’…. 그렇지만 멀잖아 맞이할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의 오후다. ‘그냥’은 그냥이 아니다.

이 책의 표지 상단에는 제목 위에 작은 글씨로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라고 적혀 있다. 또한 하단에는 본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자리 잡고 있다.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상단의 문구는 작가에게 애도의 대상이 있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애도란 사람이나 대상의 죽음을 슬퍼하는 태도나 정서를 가리킨다. 이 책이 작가 사후에 출간되었고, 그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남긴 글을 묶어 낸 책임을 감안한다면, 상단의 문구는 다음과 같이 바꿔야만 마땅하다. ‘철학자 김진영을 애도하는 일기’라고.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 스스로의 삶을 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죽는 순간을 알지 못하는 자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죽음이 사뭇 멀게만 느껴지는 자의 오만으로 인해 우리는 감히 저 ‘순간’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의 가벼움에 거리를 두는 너그러운 비애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일망정 죽음에서 비껴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느꼈을 그의 삶에 대한 애착을 우리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가득하다. “가벼운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온다, 페달을 멈추고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집 앞 단지 마당길 모퉁이로 들어서는 긴 타원의 부드러움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가 아름답다고 한 평범한 일상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과 나의…. 무엇이 더 필요한가.

신상조(문학평론가)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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