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계부, 태후의 남편, 상대등 역할로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다

▲ 상당산성은 중부내륙지역 교통요충지에 설립된 신라시대 쌓은 산성이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대치했던 지역의 군사적 중요시설로 4.2㎞에 이르는 대규모 산성이자 원형이 잘 남아 있는 포곡식산성이다. 산성의 남문 공남문.
▲ 상당산성은 중부내륙지역 교통요충지에 설립된 신라시대 쌓은 산성이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대치했던 지역의 군사적 중요시설로 4.2㎞에 이르는 대규모 산성이자 원형이 잘 남아 있는 포곡식산성이다. 산성의 남문 공남문.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것들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생각과 다르게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그렇다.



“지증왕 13년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 줄…”

이사부가 울릉도를 점령한 사실이 드러나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노래하고, 국사책에서도 이사부의 이름을 기록해 우리 귀에 익숙할 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지증왕과 울릉도를 생각하면 쉽게 떠올리며 이사부를 잘 알고 있는 듯 하지만 이사부의 아내, 이사부의 아들, 이사부가 차지하고 있었던 권력, 그의 전쟁사, 이사부가 신라에 미친 영향력 등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이사부는 훨씬 대단한 인물이다. 이사부는 울릉도를 점령해 신라의 땅으로 복속시킨 것 외에도 도살성과 금현성을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교두보를 마련한 장군이다.



이사부는 또 진흥왕의 어머니이자 태후였던 지소부인과 부부의 인연을 맺어 진지왕의 어머니 숙명궁주와 미실의 남편 세종을 낳은 아버지이다.



특히 진흥왕이 정복군주로 백제, 고구려, 가야 등과 전쟁을 하며 신라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이면에는 이사부의 직·간접적인 활약이 상당히 작용했다. 진흥왕의 계부이자 진흥왕 초기 섭정을 맡았던 지소태후의 남편과 병부령 및 상대등을 맡으며 한때 실질적인 신라 최고의 권력자요 대신이자 장군이었다.





▲ 상당산성 남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과 성루.
▲ 상당산성 남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과 성루.




◆이사부

이사부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화랑세기 등의 역사서에도 그의 전쟁, 사랑과 같은 다양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사부의 출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 지증왕과 진흥왕 대의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 중간시기인 법흥왕 때의 흔적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아 미스테리다.



이사부의 성은 김씨이고, 내물왕의 4세손이다. 이사부는 지증왕때부터 진흥왕때까지 상당한 활약상이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법흥왕 시기에는 이사부의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여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이사부는 태종(苔宗)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태종의 아버지는 아진공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이다. 그런데 태종을 둘러싸고 있는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이 부인인 지소태후이다. 지소는 본디 이름이 식도부인이고 법흥왕의 딸이었다. 처음 입종에게 시집을 가서 진흥왕이 된 삼맥종을 낳았다.



지소는 또 법흥왕의 유명으로 박영실(英失)을 계부로 맞이하여 황화공주를 낳았다. 이때는 이미 입종이 먼저 세상을 뜬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소는 영실과 헤어지고 이사부와 결혼했다.



▲ 상당산성의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 상당산성의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이사부는 지소부인과의 사이에서 숙명공주와 세종을 낳았다. 제6대 풍월주인 세종은 미실의 남편이 됐다. 세종과 미실의 결혼을 추진하면서 지소와 이사부 사이에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를 통해 이사부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며 지소가 이사부의 뜻을 물었다.

태종(이사부)이 “폐하의 집안일을 어찌 감히 말씀드리겠습니까”며 “영실은 법흥왕의 총신입니다. 유명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고 하니 지소태후가 기뻐하며 세종과 미실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사부는 지증왕 때에 우산국을 평정한 장군으로 활약했고, 진흥왕 때에는 왕의 섭정을 맡았던 지소태후의 남편이자 병부령, 상대등으로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행세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 상당산성 정상부에 치루를 만들어 적의 공격에 방어하기 유리하도록 조성한 성벽.
▲ 상당산성 정상부에 치루를 만들어 적의 공격에 방어하기 유리하도록 조성한 성벽.




◆이사부의 전쟁

이사부의 전쟁에 대한 활약은 변경의 관리가 돼 대가야국을 멸망시켜 합병한 일, 우산국을 병합한 일,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일 등이 대표적으로 손꼽힌다.



우산국 병합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본기 지증왕조, 도살성과 금현성의 함락 사실은 진흥왕조에 각각 기록돼 있으며, 가야를 빼앗은 일은 열전의 사다함 조에서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지증왕은 어릴 때부터 내물왕의 4대손으로 지혜로우면서도 무예솜씨가 빼어난 이사부를 곁에 두고 친구처럼 지내며 미래를 함께 꿈꿨다.



이사부는 소지왕의 후궁인 벽화의 아버지 날이군 파로군주와 그의 아들 위화랑과 함께 눌지왕의 외손인 지대로와 어울려 벽지에서 무예를 닦으며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한 야망을 불태웠다.





▲ 상단산성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 상단산성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이사부의 솜씨는 고구려군이 동해안을 타고 침략해왔을 때 잘 증명됐다. 강릉과 삼척, 울진, 영덕을 지나 파죽지세로 흥해까지 밀고 내려오는 고구려군사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이사부의 지략이었다.



고구려 병사들이 물밀 듯이 쳐들어오는 정보를 입수한 이사부는 지대로와 함께 곳곳에 지형지물을 이용한 함정을 파고, 병사들을 매복시켜 적들의 진격속도를 지연시키는 한편 두려움을 심어줬다. 이어 날이군 파로군주의 병사들이 후미에서 합공할 수 있는 지역으로 적을 유인해 신라 도성으로 들어가려는 고구려군사를 완전히 패퇴시켰다.



이러한 이사부의 지략과 뛰어난 전술전략, 무예솜씨를 직접 지켜본 지대로는 왕권을 빼앗는 시기에도 적절히 활용해 손쉽게 소지왕과 반란군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



이사부는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적절한 사랑과 견제를 받아야 했다. 이사부의 지략과 무력이 병사들과 합쳐 역으로 공격해 온다면 감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증왕은 이사부를 병부령에 앉히고도 외곽지를 지키는 장군으로 활용했다. 이사부는 지증왕 13년, 512년에는 지금의 강릉 아슬라주의 군주를 맡고 있었다.



지증왕의 이러한 전술로 이사부는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을 막는 일선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또 험한 바다의 거리를 믿고 신라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우산국을 정벌하는 일에도 이사부가 앞장서야 했다.



이사부는 법흥왕 시기를 지나 진흥왕 때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거머쥔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지만 지나친 욕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 산성의 동남쪽에 복원된 정자 보화정.
▲ 산성의 동남쪽에 복원된 정자 보화정.


진흥왕의 계부이지만 병부령으로 신라의 전체 병권을 움직이면서도 수도를 경비하는 한편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에는 항상 선두에서 지휘하는 전술가적인 맹장의 모습을 보였다.



이사부는 지증왕과 진흥왕을 거치는 동안 한참 커가는 신라의 정복 전쟁에서 선봉장이었던 셈이다. 신라는 지증왕 때에 비로소 나라의 격을 갖춰 나가는데, 이사부 같은 장군이 있어서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사부는 신라를 신라 답게 키운 일등공신이었다. 그의 머리에서 시작한 정복 전쟁은 신라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초석이 되었다.



이사부의 마지막 전쟁은 550년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한 때라고 본다. 이사부는 진흥왕에게 꾀를 내어 지친 두 나라의 성을 빼앗자고 하여 이를 성공시키는 선봉장에 나섰다.



백제로부터 도살성을 빼앗으면서 신라와 백제는 우방에서 적으로 돌아섰다. 또 도살성싸움에서 비롯돼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고, 관산성전투에서 신라는 백제의 성왕을 죽이고 크게 승리했다. 이사부의 지략이 크게 작용한 전쟁이다.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빼앗은 신라는 두 성의 구역을 합해 군사들을 배치시켜 지키면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와 연합해 신라에 대항했던 가야를 치기로 했다.



대가야 멸망전에 참전했던 이사부는 가야지방의 세력과 지세를 잘 아는 가야 출신 김무력을 앞세워 완승했지만 등으로 파고든 화살을 피하지 못해 긴 투병 끝에 결국 사망했다.



▲ 상당산성의 동남쪽에 조성됐던 저수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석재들.
▲ 상당산성의 동남쪽에 조성됐던 저수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석재들.




◆이사부의 권력

이사부는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와 결혼해 숙명궁주와 세종을 낳았다. 숙명궁주는 진지왕의 아내가 됐고, 세종은 미실을 아내로 두고, 풍월주가 돼 신라의 병권을 손에 넣었던 실력자의 위치에 올랐다.



이사부가 지소태후의 남편이 됐을 때 지소태후의 부탁으로 태후의 아들이었던 7세의 어린 삼맥종을 왕좌에 앉히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이사부는 당시 실질적인 병권을 손에 쥐고, 귀족들에게도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하며 화백회의에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사부의 권력이 최고 정점에 이른 시기는 바로 이사부의 딸 숙명궁주가 오빠인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태자를 낳은 이후였다. 진흥왕의 큰 아들 동륜이 죽자 태자 즉위를 두고 권력다툼이 심각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진흥왕은 동륜의 아들 백정(훗날 진평왕)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이에 반해 숙명궁주와 지소태후, 이사부의 후인으로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던 거칠부, 진흥왕의 후궁으로 자리를 잡은 미실이 각자의 욕심을 숨기고 힘을 모아 숙명의 아들 진지를 태자로 옹립했다. 이들의 뒤에는 이사부가 울타리로 작용했다.





▲ 상당산성 성내에 위치해 있던 구룡사의 내력을 기록한 구룡사 사적비.
▲ 상당산성 성내에 위치해 있던 구룡사의 내력을 기록한 구룡사 사적비.


이사부는 왕의 아비요, 태후의 지아비이자 태자의 외할아버지라는 혈연적 지위와 병권을 비롯한 실질적인 나라의 최고 실력자의 위치인 상대등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이사부는 나이가 들면서 전쟁에서 얻은 병마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후인으로 거칠부를 지정해 나라의 일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가르치고, 또 대신으로 발탁했다.



이사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었지만 절대 교만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위한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얼마든지 왕의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아들, 손자뻘 어린 왕손들에게 지위를 물려주면서 죽을 때까지 선비적 풍모를 잃지 않았다. 딸 숙명궁주는 이사부를 화랑들에게 심지어 “신으로 모셔야 할 분”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