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코로나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관광코스 100개를 선정했는데, 한때 대구의 골목투어가 7위에 올라 이 곳에 살고 있고 늘 근무하고 있던 나에게는 새로운 자부심과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해 2만여 명 이상이 방문하는 청라언덕 의료선교박물관은 ‘대구 중구 근대로의 여행’ 골목투어가 시작되는 곳으로 많은 관광객과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교 박물관인 ‘스윗즈 주택’ 옆에는 특이하게 대구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의 자손목이 있고 이를 안내하는 글귀가 있다.

“여기에 뿌리 내린 이 사과나무는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미국에서 들여온 한국 최초 서양 사과나무의 자손목으로, 동산의료원 역사를 말할 뿐만 아니라 대구를 사과의 도시로 만든 의미 있는 생명체이다. 초대 병원장 우드브리지 존슨 박사가 미국 의료선교사로 동산병원에 재임하면서 미국 미주리주에 있는 사과나무를 주문해 이곳에서 재배한 것이 대구 서양 사과나무의 효시이다.”

존슨박사가 우리나라에서 환자를 진료하면서, 비타민C 결핍으로 인한 각기병이 많은 것을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향의 사과나무 묘목 72그루를 시민에게 나눠 주었고, 이것이 널리 보급돼 그때까지 재래종 능금을 키우던 대구는 사과의 고장이 됐다.

상징주의 미술의 거장인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는 “세계에는 세 개의 사과가 있다.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이다”고 했다.

인류 역사를 뒤바꾼 첫 번째 사과는 이브의 사과이다. 천지창조 이후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 살게 된다. 아담과 이브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따먹어도 되지만,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의 나무에서 나는 선악과만은 절대로 만지지도 먹지도 말라’고 명한 하나님의 금기를 어기고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어 버린다. 이 사건으로 아담과 이브는 영원한 생명을 잃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 이브의 사과를 아는 것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의 정신 헤브라이즘(Hebraism)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리스 로마 사상인 헬레니즈(Hellenism)와 함께 유럽의 정신적 전통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사과는 영국의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Isaac Newton,1643~1727)의 사과이다.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로 알아낸 만유인력의 법칙과 그 외 수많은 고전 역학 덕에 인류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뉴턴의 업적은 서양인들의 사고와 사유 방식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작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 번째 사과는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프랑스 화가인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의 사과이다. 세잔은 사과를 주제로 한 정물을 즐겨 그렸는데, 그가 생전 그린 사과 그림은 무려 110여 점에 달해 그야말로 ‘사과의 화가’라고 불릴만 하다. 전통 정물 표현 기법과는 다르게 세잔의 정물 캔버스 안에는 어떤 것은 위에서, 어떤 것은 옆에서, 또 어떤 것은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원근법이나 시점, 시선의 높낮이 등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 더 이상 회화는 아름답거나 즐거움을 주고, 현실을 모방하는, 교훈이나 상징성이 있은 작품이 아닌 ‘그림 그 자체’로 의미가 부여되는 인식의 전환이 시작돼 고갱을 거쳐, 마티스, 브라크, 피카소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네 번째 사과로 IT혁명을 일으킨 스티브 잡스의 사과 애플(Apple)을 들기도 한다. 한 입 베어먹은 사과의 로고를 사용하는 애플사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에 복잡한 최신 정보통신기술을 단순하고 일관적인 디자인으로 집약해 넣었다. 테크놀로지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을 융합했는데 테크놀로지에서는 기계의 마음을 읽고, 리버럴 아츠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 두 가지가 결합됐을 때 가슴을 울리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터페이스의 혁명을 주도했다

나에게는 동산병원 초대원장인 존슨박사의 사과가 네 번째 사과로 다가온다. 처음으로 제왕절개수술을 시행하고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사과를 통해 질병을 예방하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꾼 사과에는 ‘창조, 도전, 혁신’이 들어 있다. 이브의 사과를 통한 서양 기독교 문명의 힘, 뉴턴의 사과를 통한 서양 과학의 패러다임 전환, 세잔의 사과를 통한 현대 미술의 창시, 잡스의 애플의 공통점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인류문명의 새장을 열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사과가 우리의 세상을 바꿔 줄 수 있을까? 존슨 병원장의 사과나무 도입을 계기로 20세기 초부터 우리나라 사과는 중요한 경제작목으로 각광을 받아 왔으며, 그 과정에서 사과는 대구 산업의 상징이자 대명사로서의 위치를 굳혀 왔듯이. 이 땅에서 세상을 혁신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새로운 사과가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대한다.

김준식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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