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이솔희

발행일 2022-01-27 09:36:1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할머니 반짇고리에 담겨있던 색실꾸러미/실실이 풀려나와 앞마당을 적신다/시름을 녹이려는 듯 언 가지 적시는 손길//미루나무 꼭대기 따라 연초록실 풀어놓다가/벚나무 가지에 앉아 공그르는 분홍색실,/희미한 밑그림 따라 한 땀 한 땀 수놓아 간다//시나브로, 수틀 속에 내리는 정갈한 마음/오래된 그리움도 바늘귀에 꿰어서/후투티 날아간 자리에 목련 송이 피운다.

「뼛속에 감도는 울음」 (2017, 제6집)

이솔희 시인은 2002년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겨울 청령포’와 단행본 ‘한국 근대시조에 나타난 이미지’가 있다.

며칠 뒤이면 설이다. 그 며칠 뒤이면 2월4일 입춘이다. 우리는 모두 입춘대길의 뜻을 안다. 곧 봄이니 누군들 설레지 않으랴. 설레다가 들레어서 발길이 곧장 들길로 향할 수 있다. 오미크론이 극성이지만 봄이 미루어질 수는 없다. 봄은 이미 와 있다고 봐도 좋을 터다. 일주일 전 통영 바닷가 바로 앞에 집필실을 마련한 시인의 초대로 지인 몇몇이 방문했다. 때로 파도가 뛰어올라 이층 창문을 두드리면서 소금 자국을 남길 정도로 바다에 가까운 곳이다. 멀고 가까운 곳에 여러 섬이 떠 있어서 아름다움을 필설로 다 할 수 없었다. 정성스럽게 가꿔 놓은 텃밭에 여러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갓 김치를 담는 갓과 꽃배추, 대파와 부추 사이로 별안간 호랑나비 두 마리가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히 황금빛 호랑나비였다. 또 다시 봄이로구나,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봄이면 우리는 봄비를 기억한다. ‘봄비’를 말하려다 서두가 길어져 버렸다. 할머니 반짇고리에 담겨있던 색실꾸러미가 실실이 풀려나와 앞마당을 적신다, 라면서 화자는 아련한 그리움을 떠올린다. 시름을 녹이려는 듯 언 가지 적시는 손길이 미루나무 꼭대기 따라 연초록실을 풀어놓다가 벚나무 가지에 앉아 분홍색실을 공그른다. 그리하여 희미한 밑그림 따라 한 땀 한 땀 수놓아 가고 있다. 시나브로 수틀 속에 내리는 정갈한 마음과 오래된 그리움도 바늘귀에 꿰어서 후투티 날아간 자리에 목련 송이를 봄비는 피운다. 이렇듯 잔잔한 서경 속에 그리움의 정조가 잔잔히 흐른다. 아직은 이르지만 곧 이 땅에 봄이 오고 이따금 봄비가 내릴 것이다. 만화방창한 날에 봄비가 내리면 비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른 땅을 적시는 비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단시조 두 편을 보겠다. 먼저 ‘친구’다. 어제도 옥신각신하고 오늘도 아웅다웅해 지독히 미워하냐고 물었더니 아니야 매우 사랑해, 라고 답한다. 다투면서도 우정이 이어지고 있다. 삶은 그런 것이다. 애증의 교차를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서로가 가진 모서리를 깎아주고 있는 중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상호보완적이다. 그렇기에 우정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소통점 찾기’에서는 청국장 만들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걸 계속 젓나 한 번씩 저으면 되지, 라고 하자 안 저으면 어쩌나 한 번씩은 저어야지, 라고 답을 한다. 남편의 말에 아내의 대답인데 화자는 남편의 잔소리 속에 내 모습이 보인다, 라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또 위하면서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 모든 것을 달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설날이 기대된다. 방역에 최선을 다하면서 고향을 다녀와야 하겠다. ‘봄비’가 그리는 아름다운 정경과 같은 가족 간의 화목한 만남을 그려보면서 봄을 앞당겨 생각해 보았다. 곧 화신이 북상할 것이다. 매화향기가 코앞에 느껴지는 듯하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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