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의 미술과 사람 사이)극재 정점식-스승의 당부

발행일 2022-01-27 09:35:5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서영옥 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장(미술학박사)

“예술가는 고래로부터 국가나 민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 계속해서 이 존경의 대상으로 존재할 것이며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이나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과 괴로움의 벗이 되고 착한 삶과 그릇된 일에 대한 치송과 계고(戒告)를 주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재(克哉) 정점식(鄭點植, 1917-2009)(이하 극재)의 말이다. 극재의 저서 ‘아트로포스의 가위’ 표지에 수록돼있다. ‘아트로포스의 가위’는 극재의 첫 번째 에세이집이다. 극재는 이 책 서문 5~8p를 ‘아트로포스(Atropos)의 가위’로 채우고 책의 제목도 ‘아트로포스의 가위’로 달았다.

고백하건대 극재는 나의 스승이다. 스승은 지식전달 외에도 인간의 도리나 자연의 이치처럼 사고의 범위를 확장시켜준 존재를 일컫는다. 극재는 후학과 후진들에게 진정한 예술가의 길을 제시하곤 했다. 시지각적(視知覺的)적 사고에 눈뜰 것과 예술의 허상에 매몰되거나 예술로 삶을 치장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질문에는 주저함이 없어야 하며 강단에 설 때조차 탐구하는 학생의 자세를 유지하라고 했다. 스승의 가르침은 순간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섬광처럼 번득인다.

극재를 처음 본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다. 당시 극재는 70대였고 퇴직 후 명예교수로 학교에서 한두 과목의 수업을 이끌었다. 그 후 극재와는 20여 년을 스승과 제자의 자리에서 동시대를 함께 호흡할 수 있었다. 당시는 일련의 과정들이 선물 같은 귀한 시간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뒤늦게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스승의 궤적을 더듬어 공유할 수 있어 더욱 기쁘다. 지극히 주관적인 존경심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례가 있다. 극재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그것이다.

2017년은 극재가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대구의 몇몇 미술기관(학강미술관, 분도갤러리, 극재미술관)에서는 극재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다. 고인의 탄생기념행사가 사사하는 바는 크다. 주목할 만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1917년 성주에서 태어나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시기와 만주 하얼빈에서 한국 교포를 위한 초등학교(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던 1941-1946년을 제외하면 극재는 줄곧 대구에 거주했다. 대구에 거처를 두고 꾸준히 창작활동을 하다가 2009년에 작고한 극재는 그야말로 대구 토박이 미술인이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던 극재가 미술계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극재에 대한 조명은 미온한 편이다. 이유는 분분하다. 중앙이 아닌 지방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구미술계의 의견이다.

극재(克哉)라는 호는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이다. ‘아트로포스의 가위’에 관심을 기울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극재는 태어나면서부터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고난과 맞닥뜨렸다. 이어 한국전쟁(1950년)과 마주했던 녹녹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럼에도 세월에 굴복하거나 안일함에 정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지식의 폭을 넓혔고 고루한 형식의 답습을 거부하며 창작했다. 아트로포스의 가위처럼 극재의 작품은 절단(또는 단절)으로 빚어낸 결실이다. 예술에서는 생명줄과 같은 혁신을 과감하게 실천했던 작가였다. 절차탁마의 흔적은 극재의 그림과 책 곳곳에 묻어있다. 극재의 거실(대덕맨션) 테이블 위에는 늘 신문과 책이 나란했고 펜과 메모지도 그 곁을 지켰다. 제자에게 배움의 자세를 유지하라고 한 것은 강요가 아니었다. 극재 자신에게 체화된 모습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한국의 서양화 도입기에 대구에서는 구상미술이 먼저 둥지를 먼저 틀었다. 극재는 당시 크게 환영받지 못하던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활약한다. 추상과 구상은 차츰 무게중심을 이루며 현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974년 대구가 한국에서 현대미술제를 가장 먼저 주최할 수 있었던 것도 극재를 비롯한 추상미술의 선구자들이 혁신적인 미술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아트로포스의 가위 표지에 새겨진 극재의 말은 평생을 교육자이자 예술가로 살아온 스승이 후학들에게 하는 당부가 아닐까 한다. “예술가는 고래로부터 국가나 민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 계속해서 이 존경의 대상으로 존재할 것이며 존재해야만 한다.” 코로나19라는 시련 앞에 우리는 위축된다. 그러나 ‘극재(克哉)’라는 호의 의미처럼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스승은 고인이 돼서도 느슨해진 예술정신을 조여주고 우리 삶의 행간을 의무와 책임으로 채운다.

서영옥 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장(미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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