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대구대교구가 설립한 대구 최초의 초등학교 ||중구 계산동의 ‘해성재’에서 출발, 현재

▲ 대구효성초등학교의 현재 모습.
▲ 대구효성초등학교의 현재 모습.
대구효성초등학교(대구 달서구 송현로 81)는 역사의 혼돈기였던 대한제국 시절인 1898년 천주교대구대교구가 설립한 대구지역 최초의 초등학교이다.

안중근 의사가 강연했던 한문서당인 ‘해성재’에서 출발해 ‘해성학교’를 거쳐 오늘날의 ‘효성초등학교’로 변화됐다.

현재 547명이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졸업생은 9천685명에 달한다.

오랜 시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인간다운 인간 양성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이라는 교육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 124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효성초등학교를 만나본다.

▲ 효성여자보통학교 제2회 졸업생들의 단체 사진.
▲ 효성여자보통학교 제2회 졸업생들의 단체 사진.
▲ 효성초 18회 졸업생들의 사진.
▲ 효성초 18회 졸업생들의 사진.
◆학교 설립 역사

효성초의 역사는 약 1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3년부터 경상도를 순회하며 천주교회 대구본당 주임 사제로 임명된 아실 폴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프랑스인, 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1898년 10월 대구 계산성당 내에 한문서당인 해성재를 개설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운명이 기울어지고 있는 상황에 천주교회에서는 총칼로 맞서기보다 국민이 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계몽운동을 펼쳤다.

김보록 신부는 1908년 4월 해성재를 해체하고, 성당에서 세운 학교라는 뜻의 ‘성립학교(聖立學校)’를 세웠다.

성립학교는 당시 대구 교육의 원조 역할을 했다. 구한말(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까지의 시기)과 일제를 거쳐 40년간 민족 계몽과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학교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겨 버린 상황에서 뜻이 있는 사람들은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국가의 힘을 키우고자 했다.

이에 1910년 11월19일 성립학교에 대구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여성부를 병설했다.

그 후 일제의 방해로 학교 운영이 어렵게 됐고, 1916년 천주교 신자 중에서 재력이 있는 후원자가 나서서 성립학교를 인수하고 학교 이름을 ‘해성’으로 고쳤다.

1924년 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의 초대 주교장인 플로리안 드망즈 주교는 해성학교 여자부를 완전히 독립시켜 4년제 보통학교인 ‘효성여학교’를 설립했으며, 1925년 5월에 6년제 ‘효성여자보통학교’로 승격시켰다.

1939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효성여자보통학교를 ‘효성소학교’로 변경했으며, 1941년 3월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교육의 일환으로 황국신민을 기른다는 취지로 모든 소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바꿨다. 효성소학교는 ‘효성국민학교’로 개칭됐다.

1966년부터 해성재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학생을 받기 시작해 남녀공학으로서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오랜 세월 계산성당과 함께한 효성초등학교는 부지가 협소하고 건물이 노후화돼 신축 교사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후 한 단계 더 큰 도약을 위해 1993년 중구 계산동에서 달서구 송현동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에 이른다.

◆교사의 변천사

▲ 2002년 교내미술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의 모습.
▲ 2002년 교내미술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의 모습.
▲ 지난해 영어수업을 듣고 있는 재학생들의 모습.
▲ 지난해 영어수업을 듣고 있는 재학생들의 모습.
천주교 교회에서는 1882년부터 프랑스 신부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자녀에게 문자해독과 교기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서당 규모의 학교를 설립했다.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골(현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의 일반 가정에 연화서당을 설립해 신자 자녀들과 인근 외교인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후 1898년 10월 김보록 신부는 대구본당(현 계산성당)에 해성재에 한문서당을 설립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식 십자형 목조기와집 성당을 건립하면서 2층을 신부사랑과 복사사랑 및 서편에는 신자회의실 겸 교육관인 해성재 등 부속 건물도 같이 건축했다.

1906년 7월에는 기부금을 모아 학교 교사를 지었다. 이어 1908년 해성재를 해체하고, 성립학교를 세웠으며 학교교육을 정상화시켜 나감에 따라 시설과 교육내용도 정상궤도에 오른다.

이에 학교에서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9년 4월부터 사제관 옆에 별관을 지어 여자부를 병설했다.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사립학교법에 의해 학교의 건물과 운동장 등의 시설과 교사의 인원을 증원해야 하는 학교시설 확장문제가 대두돼 문을 닫을 뻔한 기록도 있다.

하지만 1915년 9월 대성당 북편 땅 490평 부지에 4학급의 교실과 사무실, 운동장을 새로 마련하고 교명을 해성학교로 바꾸었다.

이후 1924년 해성학교로부터 독립해 개교한 효성여학교는 1929년 학교부지를 넓히고, 본관 2층 8개 교실을 신축하고 강당을 증축해 완공했다.

1936년도에 이르러서는 11학급으로 늘어 교실을 더 늘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됐으며, 2층 교실 6개를 증축해 부족한 교실을 보충했다.

1954년 9월8일에는 미군 KMAG에서 자재를 원조받아 구 해성학교 부지에 신관 2층 8개 교실을 증축했다.

이 부지는 당시 성당에서 강당으로 쓰던 터였다.

1954년 10월에는 운동장 150평을 사들여 확장했다.

1966년 3월1일 학급을 18학급으로 증설하고 남녀 공학을 했으며 1967년 4월 중구 계산동 2가 89번지에 철근 콘크리트조 4층 22개 교실 신축 착공해 1971년 12월10일 완공했다.

▲ 1984년도 컴퓨터실 개설 당시 학생들이 컴퓨터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 1984년도 컴퓨터실 개설 당시 학생들이 컴퓨터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1992년 1월6일 현 위치에 신축교사를 착공해 같은 해 12월28일에 완공했으며, 1993년 2월17일 학교 위치 변경 승인을 받았다.

당시 각 교실에 최첨단 시청각 기기 시설을 확충했고, 예절실 겸 방송실 시설을 완비해 교내 TV 방송을 실시했다.

1995년 5월에는 교육 선진화 사업 및 사무자동화 사업을 추진했다. 컴퓨터실, 어학 실습실 등을 설치했으며 1996년에는 대구에서 최초로 PC통신(인터넷)을 개통해 컴퓨터 교육과 온라인 교육을 시행했다.

개교 110주년 기념 학교 증·개축공사도 진행됐는데, 2007년 7월14일에 시작해 2008년 2월에 마무리됐다.

각 학급 교실의 사물함이 모두 벽면에 내장되고 교실 바닥이 강화마루로 교체됐으며, 각 층 화장실에 좌변기가 놓이고 샤워기도 설치되는 등 리모델링을 거쳐 새단장됐다.

특히 증축된 1층에는 컴퓨터 2실을 인성교육을 담당하는 나눔실로 바꾸었고 보건실, 영어교실, 영어교시연구실 등이 만들어졌다.

2층에는 도서멀티미디어실 및 1개 교실이 새로 만들어졌으며, 3층의 샛별관은 400여 석의 전동식 접의 의자가 설치돼 체육관과 대강당을 겸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증축된 5층에는 오케스트라시르이 주 기능과 함께 각종 크고 작은 공연과 모임을 할 수 있는 마리아홀과 3개의 레슨실, 2개 학급 교실이 새롭게 마련됐으며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2015년 7월에는 교사 B동을 증축해 학급 교실 2칸, 문구점, 체육창고, 기사실을 만들었다.

2019년 1월에는 교실 천장의 석면 제거 공사를 마무리해 무석면 학교가 됐으며 같은 해 9월에는 교내에 있던 성요셉성당이 옮겨감에 따라 성당이 활용하던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해성재와 인성관 교육환경개선 사업을 실시해 소체육관, 골프연습실, 도예실, 난타실 등 특색 교육이 이뤄지는 특별 교실이 새롭게 마련됐다.

지난해 9월에는 지진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교사에 대한 내진 공사를 마무리했다.

다음 달에는 더욱 현대화된 교육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영어실, 컴퓨터실, 나눔실, 보건실, 사랑실 등에 대한 교육환경 개선 공사를 진행한다.

▲ 1993년 7월20일 발행된 효성안테나 56호
▲ 1993년 7월20일 발행된 효성안테나 56호
▲ 1974년 2월16일 발행된 효성신문 32호.
▲ 1974년 2월16일 발행된 효성신문 32호.
◆효성의 자랑 ‘효성’, ‘효성 안테나’ 홍보지

효성초는 발간된 대표적인 홍보지 ‘효성’과 ‘효성 안테나’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신문으로 발간된 ‘효성’은 1974년 2월16일 B4크기의 32호가 가장 오래된 신문이다.

아쉽지만 오랜 역사로 인해 보관이 어려운 탓에 그 이전의 신문은 남아 있지 않다.

효성의 1974년 이후 신문을 보면 개교기념일이 있는 11월에 맞추어 1년에 1회 정도 발행된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창간호부터 잘 보관돼 전해졌다면 1940~1960년대의 교육활동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고, 당시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대해서도 가늠해볼 수 있어 아쉬움이 있다.

‘효성’은 신문 형식으로 발간되다가 1985년 3월30일 학부모를 위한 ‘효성 안테나’로 창간됐다.

전파를 안방으로 수신하는 안테나라는 이름처럼 학교와 가정의 가교 역할로 격월 발행됐고, 학교의 교육활동 전반을 안내하고 실적을 실어 학부모의 이해와 협조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효성 안테나는 60호(1994년 6월1일)부터 내용을 확대해 아동의 문예작품과 교사 칼럼, 학부모의 참여까지 아울러 알찬 교보로 꾸며졌다.

효성 안테나가 효성 신문의 역할까지 하면서 발간이 중단됐던 효성 신문은 1997년 7월에 재발간됐다.

당시 효성 신문은 어린이신문기자단에 의한 교내의 여러 행사가 어린이의 시각에서 기사가 작성돼 의미를 더했고, 대학부모 홍보지인 효성 안테나와 성격을 달리했다.

효성 신문 58호(2002년 7월1일)에는 효성신문과 효성 안테나의 성격을 더해 발간됐다.

대상이 어린이와 학부모, 지역사회까지 확대되고 내용도 교사와 학부모 교육칼럼, 행사 소식, 각종 교육활동 보고서, 문예작품, 그림 작품 등으로 다양해졌다.

현재 지난 6일 84호까지 출간돼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홍보지 뿐 아닌 효성초의 큰 자부심인 100년 가량 함께한 나무도 있다.

중구 계산동에 위치할 시절의 효성초와 계산성당의 뜰에서 학생들과 함께 자라며 효성과 함께한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이 나무는 1989년 효성 신문의 표지 사진으로 책 읽는 학생들과 함께했다.

또 대구 출신의 천재 화가인 이인성이 1930년대에 그린 ‘계산성당’의 배경이 된 나무 중 한 그루로 ‘이인성 나무’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계산성당과 함께 변함없이 자라고 있다.

▲ 박비오 교장
▲ 박비오 교장
◆박비오 교장 인터뷰

“효성은 학생 그 자체로 ‘완전한’ 인격체로 바라보며, 그들 안에 숨겨진 ‘거룩함’이 바르게 표현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부 박비오 효성초등학교 교장이 효성초등학교는 124년 동안 변함없이 교육의 본질인 ‘인간다운 인간 양성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을 추구해 왔다고 밝혔다.

인재 양성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에 효성이 추구하는 교육은 ‘인성교육’, ‘지성교육’, ‘감성교육’ 3가지다.

학생들은 훈육의 대상이 아닌 완전체로서 안정감과 신뢰감을 갖게하는 인성을 겸비하도록 하고, 지성교육 중에서도 외국어 영역, 영어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영어실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또 체육,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문화체험을 통한 감성교육으로 학생들의 안목을 확장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박비오 교장은 “샛별 또는 금성이라 불리는 ‘효성’(曉星)이라는 이름에 녹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며 “효성은 새벽에 가장 먼저 뜨는 별이 아니라, 새벽까지 남아있는 별이다. 가장 마지막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자신의 빛을 드러내는 별이기에 효성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의 별’이다”고 말했다.

이어 “효성 가족은 학생들이 이 시대에 희망의 별이 되기를 지향하고, 학생들이 그런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학생들의 샛별’이 될 것이다”며 “앞으로도 효성초는 미래의 주인공이 될 어린이들에게 꿈, 행복, 감동의 협력자가 될 것을 약속한다”고 했다.



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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