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개교, 대구 최초 공립초등학교||김부겸 국무총리 비롯 전 대구시장 등 대거 배출

▲ 대구초등학교 전경.
▲ 대구초등학교 전경.
우리의 기억 속 학교의 1900년대 모습은 어떨까.

태어나기도 전인 100년 전부터 일제강점기와 독립 등 유수한 역사적인 날을 거쳐온 학교의 생명력은 뿌리깊게 간직해야하는 역사와 다름없다.

그 학교에서 꿈을 키워온 동문들은 미래 큰 자리에 앉아 지역 발전을 이끄는 하나의 주역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대구·경북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학교가 제법 있다.

100년 명맥을 잇고 있는 대구·경북의 자랑거리인 학교들의 변천사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대구초등학교(대구 중구 명륜로23길 80)는 대구 최초 공립초등학교다. 현재의 중구 봉산동에서 115년을 지켰다.

1906년 개교 당시 학생 66명으로 시작해 2021년 2월까지 4만3천941명의 훌륭한 인재를 배출했다. 2021년 11월 기준 300여 명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김부겸 국무총리를 비롯해 전 대구시장 등을 대거 배출한 명문 초등학교이기도 하다.

대구와 긴 역사를 함께 해온 대구초의 빛나는 역사를 함께 들여다보자.

▲ 1906년 개교 당시 전교생 모습.
▲ 1906년 개교 당시 전교생 모습.
▲ 1940년대 학교 전경.
▲ 1940년대 학교 전경.
◆교육목표의 변천사

개교 당시 대구초는 1906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해 국권을 잃은 후 일제 통감 정치하에서 개교했다.

어려운 시기 속 지역 근대교육의 터전을 닦으며, 자유 독립을 염원하며 민족 인재 양성을 목표로 교육에 임해 왔다.

1923년 1월26일 대구초등학교는 큰 화재가 발생해 건물 전체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안타깝지만 화재로 학교의 소중한 자료들을 대부분 잃게 돼 그 당시 교육 생생한 모습들을 살펴볼 수 없다.

1960년 이후 학교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교육목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에는 주로 애국애족 정신 함양, 사회윤리의 지도 강화, 자유·자율면의 양성, 반공교육의 강화, 협동 정신의 앙양, 민족정기의 진작, 근로정신의 실천, 실력의 배양을 추구했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어린이, 새롭게 생각하며 스스로 공부하는 어린이, 질서를 지키며 협동하는 어린이, 부지런하고 물건을 아껴 쓰는 어린이, 건강하고 명랑한 어린이를 교육목표로 정했다.

1990년도 접어들면서 학교 교훈은 ‘바르고 슬기롭고 굳센 어린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창의적인 사람이 되자’ 등으로 창의성 신장에 노력했다.

2000년대에는 어린이에서 학생으로 변화되는 단계다. ‘건강하고 슬기롭고 밝고 맑은 어린이, 밝고 맑으며 슬기롭고 건강한 학생’을 추구했다.

2020년 이후부터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발맞추어 ‘함께 배우고 성장하며 늘 탐구하는 학생’의 교훈 아래 ‘더불어 살아가는 글로벌 인재 양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 대구초등학교 재학생들이 힘차게 뛰고 있다.
▲ 대구초등학교 재학생들이 힘차게 뛰고 있다.
◆시대에 따른 교육 이념의 변화

식민지 교육(1910~1945년) 시기에는 우리 민족의 저항기의 교육으로서 식민지 교육의 기본 방침을 따라야 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민족의 독립운동과 민족교육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으며, 개교 당시 대구초등학교의 학제는 조선교육령에 의해 4년제(한국인 보통학교, 당시 일본인 소학교는 6년제)로 계속돼 오다가 1920년 9월11일 학제 변경에 따라 6년제가 실시됐다.

일제강점기의 교육은 그 당시 일본은 일본제국주의 정책에 복종할 신민을 만들기 위해 우민화 교육정책을 폈다.

일본어 보급과 일본 국민이 될 성격을 함양하게 하고 보통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4년제 보통학교를 설치하게 했다.

그 시절 대구초등학교 학생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회를 비롯한 각종 의식 행사에 일본제국주의의 천황이 있는 동쪽(현재 체육관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를 해야 했다.

또 조선인 학무국장이 만든 ‘황국신민 서사’를 낭독해야 하는 약소 민족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며 공부했다.

1945년 자주독립을 맞이해 선생님의 수는 비록 적었지만 독립된 나라의 교육을 할 수 있게 됐다.

전쟁기의 대구초등학교 교육은 6·25전쟁이라는 우리 민족의 크나큰 시련은 대구초등학교도 예외일 수 없었고 학업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부할 교실과 책상이 부족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수업은 계속됐다.

1950년에는 육군병참감실이 본관 건물을 사용하면서 학생들은 학교 건물에서 공부하지 못하고 지금의 청운맨션 뒤편 공터에서 비를 가릴 정도의 허름한 가교사(假校舍)에서 책상도 없이 화판 같은 나무판자에 끈을 달아 목에 걸고 그 위에 책을 얹어 공부하게 됐다.

바닥은 나무로 된 바닥이 아니라 흙바닥이었지만 학생들은 배움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열심히 공부했다.

1960년대의 대구초등학교는 취학 학생 수보다 학교 증설이 따르지 못해 학급 수가 많이 늘어났다.

60학급 이상의 대규모 학교가 해가 갈수록 증가했고, 많을 때는 87학급까지 증가하기도 했다.

이 시기 대구초등학교의 교육 활동들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면서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들을 남기게 되고 전성기에 접어든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로 접어든 지금 대구초는 대구·경북의 초등학교 1번지로서의 명성과 전통을 바탕으로 인성과 능력을 갖춘 미래지향적인 인재를 육성하는 학교, 교육과정 중심, 학생 중심의 기초·기본교육에 충실한 학교로 거듭나고 있다.

‘꿈을 가지고 미래역량을 키우며 함께 성장하는 일번지 교육’으로 경영목표를 설정해 이를 통해 미래사회에 대비한 ‘더불어 살아가는 글로벌 인재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 대구초등학교 재학생들이 교내 프로그램 수업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대구초등학교 재학생들이 교내 프로그램 수업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1980년대 학교 전경.
▲ 1980년대 학교 전경.
◆교명 변화

현재의 대구초는 당시 대구공립소학교로 개교했다.

1906년 9월 ‘대구공립소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06년 12월21일 개교를 하는데 대구에서 한국인이 다녔던 최초의 공립소학교다.

소학교는 조선말기 신학제 제정에 따라 1895년 7월 ‘소학교령’을 공포해 초등보통교육의 실시를 위해 설치된 교육기관이다.

1960년에 작성된 연혁지에 실려 있는 대구초 설립에 관한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민족의 수난과 비극을 안고 국민의 무지를 한탄만 하면서 1906년 9월1일에 설립해 그해 12월21일 개교됐다. 일제의 침략으로 우리는 나라를 잃었고 민족의식마저 말살하려던 일본이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에 영향을 받아 일본의 침략이 극에 달했던 당시, 더구나 통감정치 하에 설립된 대구 최초의 한국인 공립보통학교인 만큼 본교 설립의 뜻이 너무나 엄청났던 것이었다.’

1911년 11월 대구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제정, 공포된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로 변경되면서 대구공립보통학교로 불린다.

이후 1938년 4월 대구덕산공립심상소학교로 변경됐다가 1941년 대구덕산공립초등학교라 칭했다.

이는 1938년도에 발간한 대구부지와 1973년 발간한 대구시사(大邱市史)에서는 ‘대구덕산공립심상소학교’라고 기록해뒀는데, 이것은 대구부지를 1938년도에 발간하면서 개교 당시(1906년)의 교명을 적지 않고 부지를 발간한 당시(1938년)의 교명을 그대로 적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941년 4월27일 화재가 발생해 후편 목조교실 상당수를 소실하게 되는 아픔도 겪게 된다.

1946년 1월 대구국민학교로 교명이 또 변경된다. 1941년 일제는 칙령 제148호 ‘국민학교령’을 통해 식민지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최고조로 높이면서 전국의 모든 소학교를 ‘황국신민의 학교’라는 의미의 국민학교로 명칭을 다시 바꾸도록 지시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23일부터 신교육을 실시했고 1946년에는 현재의 대구국민학교로 이름 지었다.

6·25전쟁 때는 육군병참감실이 학교에 설치되고 주한외국군이 주둔됐으며 그러면서도 학교의 시설 부족으로 현 대구상고 뒤편에 분교장을 설치했고 피난 온 서울남정국민학교를 편입시키기도 했다. 1973년에는 대구복명국민학교를 흡수하기도 했다.

1996년 3월 대구초등학교로 이름이 변경된다.

광복 50주년을 앞둔 1995년 8월11일 교육부는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초등학교의 명칭을 변경한다’고 발표하면서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이어 1995년 12월29일 교육법을 개정해 1996년 3월1일부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명칭 변경해 현재에 이른다.

▲ 대구초등학교 교포
▲ 대구초등학교 교포
◆대구초의 자부심

대구초를 빛낸 동문은 수도 없이 많다.

현 국무총리 김부겸(58회)을 비롯해 선종한 이문희 대주교(24회), 전 정무제1장관 박철언(44회), 전 대구시장 이의익(43회), 전 대구시장 김범일(52회)이 있다.

또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곽대훈(57회), 현 국민의힘 국회의원 류성걸(60회),전 국토부장관 강호인(60회), 전 재경부총리 김준성(20회), 전 외무부장관 박동진(25회), 전 재무부장관 사공일(42회), 전전 통일부종리 김 덕(38회), 전 3선 국회의원 안택수(46회), 전 동구청장 임대윤(60회), 현 더불어민주당 대구시당 위원장 김대진(64회), 전 대법원 대법관 정귀호(42회),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이동흡(53회), 변호사 이상선(60회), 전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허소(72회) 등이 있다.

의료계 쪽에도 빛나는 인물들을 대거 배출했다.

허병원 원장 허준영(52회), 킴스치과 원장 김석순(60회), 신경외과 원장 정현대(60회), 메디하트 내과 원장 이상민(64회) 등이 있다.

교육계에도 전 영남대학교총장 김기택(26회), 전 육사교장 김복동(36회), 전 영남대학교 총장 류창우(38회), 전 교육부총리 한완상(39회), 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장 김광남(42회), 경운대학교 총장 한성욱(60회), 원광대 한의대 교수 및 봉화한의원 원장 금경수(61회) 등이 있다.

경제계엔 상신브레이크 회장 김효일(46회), 광용건설 대표 박중현(59회), 아진산업 회장 서중호(62회), 솔린코 대표 김원창(57회), 삼화주류 대표 박신남(65회) 등이 활약하고 있다.

이 밖에 전 kt프로야구단 감독 조범현(63회), 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수석투수코치 김태한(72회)도 눈에 띈다.

◆변영은 대구초등학교 교장 인터뷰

▲ 변영은 대구초등학교 교장이 “향후 학생 수 증가 및 학급 증설에 대한 대비를 준비 중이다”고 밝혔다.
▲ 변영은 대구초등학교 교장이 “향후 학생 수 증가 및 학급 증설에 대한 대비를 준비 중이다”고 밝혔다.
“대구초 주변에는 도심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 향후 학생 수 증가 및 학급 증설에 대한 대비를 준비 중입니다.”

변영은 대구초등학교 교장이 향후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오랜 전통의 영광을 안은 대구초는 안타깝게도 여러 이유로 학생 수가 많이 줄어든 상태다. 하지만 300여 명의 활달한 모습과 알찬 학력을 자랑하며 끊임없이 발전할 계획이다.

대구초는 지난해 3월부터 내년 2월까지 2년 동안 대구시교육청 지정 교실수업개선 시범학교를 운영하며 수업 공개 및 워크숍을 성황리에 마쳤다.

그는 “이후에도 교실수업개선 방향 및 다양한 프로젝트 수업을 추진해 학생들의 미래역량 함양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고 했다.

특히 IB기초학교를 끝내고 관심학교로 선정이 되어 2015개정교육과정에 접목시켜 IB교육이 추구하는 인재상과 2015개정교육과정 및 대구시교육청에서 추구하는 학생들의 미래역량 신장을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향후 IB관심학교를 넘어서 후보학교로 승인받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앞으로는 그린 스마트 미래학교로 지정이 되어 미래 교육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미래학교 공간 확보에도 매진한다.

변 교장은 “학생들에게 안전과 학습권을 확보하고 최근 신설 학교와의 교육 시설에 대한 격차 해소 등 모두 함께 성장하는 행복한 미래학교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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