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39>문무왕

발행일 2021-11-15 09:56:18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당나라군 몰아내 삼국통일

신라 제30대 문무왕은 당나라군대까지 완벽하게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루고, 왜국의 침략을 우려해 죽어서 용이 돼 바다에서 나라를 지킬 것이라며 동해에 장사를 지내라고 유언했다. 동해바다에 떠 있는 문무대왕수중릉.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이름은 법민이다.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외삼촌인 김유신 장군을 따라다니며 전쟁터를 누비며 훌륭한 장군으로 자랐다.

법민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훌륭한 혈통을 이어받아 외모가 준수하고, 체력적으로도 뛰어났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궁중이나 전쟁터에서도 어려운 일들을 쉽게 풀어 해결해 주는 재능을 보여 주변에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법민은 또 백제와 고구려 전투에 직접 나아가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는 장군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서도 전쟁터의 앞장에 나서는 장수가 돼 당나라를 몰아내고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는 통일대왕이 된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루고도 문무왕은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해 “죽은 후에는 동해에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될 것”이라며 “내가 죽으면 화장하고, 동해에 장사를 지내라”고 유언했다.

경주 감포읍에 있는 대본초등학교 폐교 부지에 문무대왕의 업적을 기리고자 건립된 문무대왕조비. 이곳에서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 볼 수 있다.


문무왕의 아들 정명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신문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을 동해에 장사지내고,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감은사를 짓고, 바닷가로 나와 아버지를 기렸다.

신문왕은 아버지와 경쟁하며 어머니를 마음에 품고 있던 장인어른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압해 목을 베고, 왕비는 반란군의 여식이라 하여 폐하고 김흠운의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았다.

문무왕이 당나라 50만 명 대군의 침략을 막고자 사천왕사지 앞에서 명랑법사로 하여금 문두루비법을 시전하게 했다. 사천왕사지 앞에서 발견된 문무왕릉비의 비편.


◆문무왕 삼국통일

무열왕이 백제를 멸하고 죽자 큰아들 법민이 왕위를 물려받아 문무왕으로 즉위했다. 문무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 흠순 등과 함께 당나라 군사와 합세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이어 당나라를 몰아내려고 하자 당 고종은 670년 2월에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해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당나라 유격병과 장병들이 주둔지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려 했지만 문무왕이 이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대대적인 전쟁을 했다.

이듬해 당 고종이 문무왕의 동생인 인문을 감옥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시켜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불법을 공부하러 갔다가 인문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 귀국해 이 같은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방어할 계책을 논의했다. 김천존의 추천으로 명랑법사에게 비법을 물었다. 명랑법사는 남산에 사천왕사를 짓고 도량을 개설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당나라군이 벌써 국경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무늬 있는 비단으로 집을 꾸미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유가에 밝은 12명의 승려들이 명랑을 우두머리 삼아 문두루비법을 펼쳤다.

문무왕은 죽음을 앞두고 화장해서 동해에서 장사를 지내라고 유언했다. 경주 낭산 사천왕사지 북쪽에 문무왕을 화장한 장소로 알려진 문무왕탑지.


그러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 그 후에 낭산에 절을 지어 이름을 사천왕사라고 불렀다.

671년에 당나라가 다시 5만의 병사로 쳐들어왔으나 신라는 또 문두루비법으로 배들을 침몰시켰다.

당시에 한림랑 박문준이 인문과 함께 감옥에 있었는데 고종이 문준에게 그 비법을 물었다. 문준은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의 남쪽에 새로이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빌고 있다고 했다. 고종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사실을 알아보게 했다.

문무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을 미리 듣고 즉시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놓고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은 새로 지은 절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이라 했다.

이에 신라 사신들이 당나라 사신에게 은자 3천 냥을 선물로 주고, 주색으로 인사불성이 되도록 접대했다.

이에 사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절에서 빌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 이후 당나라 사신의 말로 인하여 사천왕사 앞에 지은 절을 망덕사라 불렀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왕궁을 확대하면서 동궁과 월지를 백제와 고구려의 건축과 조경기술을 융합해 건설했다. 월지에서 발굴된 목선이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되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 고구려를 멸하고 통일을 이뤘지만 당나라와 마찰이 생겼다. 신라와 당나라는 밀약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경우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에 귀속한다고 약속을 했지만 이를 어겼기 때문이다.

두 나라를 치고도 당나라가 입장을 바꿔 옛 백제의 땅에 웅진, 마한, 동명, 금연, 덕안 등의 5도독부를 설치했다.

또 당나라의 강압에 의해 취리산에 도착한 문무왕은 655년 웅진도독부의 수장인 부여융과 당나라의 사신 유인궤와 함께 회맹의 의식을 가졌다. 회맹은 당나라가 은혜를 베풀어 부여융에게 선대의 제사를 받들고, 옛 백제의 영토를 보전하게 해준다는 내용과 문무왕에게 묵은 감정을 버리고 화친을 요구한 것이다.

당나라의 강요나 다름이 없었던 이날의 회맹은 이후 지켜지지 않은 약속으로 남았다. 회맹에서 굴욕을 느낀 문무왕은 당나라를 몰아내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나당전쟁을 다짐했다.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고구려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기에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던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풍전야의 상황이었다. 드디어 문무왕이 670년 요동지역에 대한 공격과 함께 나당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기세가 오른 신라는 671년 옛 백제 지역의 영토를 차례로 점령해갔다. 하지만 당나라가 반격을 가하면서 672년 석문 전투에서 신라가 대패를 당했다.

이때 문무왕은 당나라에 사죄사를 보내며 죄를 청하는 한편 물밑으로 전쟁 준비를 계속했다. 문무왕은 옛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지원하며 당나라 축출이라는 공통된 목적의식을 형성했다.

문무왕이 왕위에 올라 남산신성을 재정비하는 한편 남산에 긴 창고를 지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창고의 기초석.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보장왕의 서자로 알려진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했고, 이어 지금의 익산의 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우게 했다.

당나라와의 기나긴 전쟁은 675년 육지에서의 매소성 전투와 676년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신라의 승리로 당의 군사를 완전히 몰아내고 막을 내렸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루고 남산에 큰 창고를 설치했다. 길이가 50보이고 너비가 15보에 달했다.

이곳에 쌀과 무기를 저장했는데 이것이 우창이며 천은사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이 좌창이다.

진평왕이 쌓았던 남산성을 다시 크게 확대해 쌓았는데 둘레가 2천850보로 전해지고 있다. 또 부산성을 쌓기 시작해서 3년 만에 끝내고 안복의 냇가에 칠성을 쌓아 올렸다.

문무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되던 해인 6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냈다. 장지는 경주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인 대왕암이다.

문무대왕수중릉의 남쪽 500m 지점에 주민들이 가미새바위로 부르는 바위. 최근 신대륙발견모임의 김성규 회장이 삼국유사 기록 등으로 유추해 진짜 문무왕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무왕의 비책

문무왕은 어렸을 때부터 외삼촌 김유신 장군에게 무술 수업을 혹독하게 수련하며 실력을 쌓았다. 무열왕이 왕위를 안심하고 물려줄 수 있는 튼튼한 태자로 키우기 위해서였고, 또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유력한 실력자 유신을 우군으로 포섭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 외삼촌 김유신을 따라 어릴 적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많은 실전을 경험한 최고의 장군으로 성장했다.

특히 삼국통일을 이루는 마지막 전투였던 매소성전투에서 김유신이 왕에게 보검을 줬다. 유신의 보검은 그가 목숨처럼 아끼며 적진을 누비며 휘두르던 신검이었다.

김유신이 단석산에서 신령에게 받은 검으로 겉으로는 묵색으로 투박해 보이지만 한번 휘두르면 거대한 화강암도 소리 없이 싹둑 무 자르듯 벨 수 있는 명검이었다.

김유신은 어릴 적부터 가보로 내려오던 검술과 단석산에서 신령스런 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에다 보검까지 얻어 전쟁터에서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적진을 누볐다. 타고난 그의 자질은 부지런히 갈고 닦은 검술을 더욱 빛나게 해 전쟁의 영웅으로 길이 전해지고 있다.

경주 낭산 사천왕사지 남쪽에 문무왕릉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 거북이 형상으로 만들어진 귀부가 남아 있다.


이러한 김유신의 자질과 특별한 비법, 보검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은 문무왕은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더구나 매소성전투에서 물밀 듯 밀려오는 당나라 군사를 낙엽 쓸 듯 휘저으며 베어 넘겨 적군에게는 사신으로, 신라군사들에게는 천신처럼 보였다.

삼국통일을 이루고 문무왕은 표면적으로는 군사적 행동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지쳐버린 백성들을 위로하고, 평화스러운 나라의 분위기를 위해 시가지 어디에서도 훤히 바라다 보이는 남산 중턱에 대규모 창고를 지어 쌀을 가득 채웠다. 배고픈 백성들은 쳐다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했다.

한편 문무왕은 아무도 모르게 특별하게 몸이 날랜 군사 300명으로 비밀수호대를 조직해 운영했다. 비밀수호대는 10명 단위로 30명의 단주를 두고, 5개 단주를 거느리는 6명의 령주, 10개의 단을 운영하는 3명의 대주, 그리고 비밀수호대를 총괄 지휘하는 보이지 않는 보주로 운영했다.

비밀수호대는 궁궐에 거주하는 나인은 물론 대신들조차 구체적인 위치와 운영되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오직 보주와 문무왕만이 비밀스럽게 운영한 조직이다.

은밀하게 월지에서 훈련을 하며 조직적인 움직임의 묘를 다듬곤 했다.

수호대는 모두 310명으로 조직해, 단주가 중심이 되어 대원들을 훈련하고, 죽거나 결원이 생기면 1대1로 대원을 충족했다.

문무왕대는 물론 신라가 멸망에 이르는 그때까지 아무도 모르게 신라의 수호신으로 운영됐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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