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당신이 쓴 시를 읽어보라고 줬다/ 나는 다 좋은데 마지막 문장이 좀 뜬금없다고 했다/ 엄마는 니가 뭘 아냐며,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문에서 읽어 온 시가 얼마며,/ 두보도 서정주도 다 읽은 사람이고/ 문창과에 다닌다는 애가 이제 보니 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네, 라며/ 엉크렇게 화를 냈다// 그게 아니라 나는 일이삼사 연이 다 좋다, 다 좋은데/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고/ 마치 내가 금강산을 다녀온 느낌까지 들었다/ 이런 표현은 어떻게 떠오른 거냐, 찬찬히 내 감상을 전한 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마무리는 일기 같다랄까 아쉽다고 했다/ 엄마는 그러니까 니가 시를 뭘 아냐며, 내가 지금까지 신문에서 읽어 온 시가 얼마며/ 봄가을이면 백일장에서 매번 상금도 타 오고/ 누구 엄마도 읽어보더니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쓰냐며 그랬는데 넌 뭐냐, 라며 화를 냈다// 엄마가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니/ 내가 뭐 시를 못 썼다고 한 것도 아니고/ 한 문장 정도 이견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냐/ 문장을 지적하는 게 이렇게 기분 나쁜 거였나 문창과 친구들은 정말 강철 심장을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차릴 때엔 한 발 물러나/ 엄마, 아마 내가 시를 많이 못 읽어봐서 이런 표현 방식에 익숙하지 못한가 봐요/ 어렵게 말을 건네 봤다/ 그러자 그건 정말이지 니가 몰라서 이해를 못하는 거다, 라며/ 그 마지막 문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엄마가 이렇게 오래 화를 안 푸는 사람이었다니/ 나는 처음으로 엄마가 아니라 허만분 씨를 화나게 만들었다/ 엄마 다시 보니 마지막 문장이 괜찮아요/ 어제는 미안했어요/ 다음 날 사과까지 했지만/ 사과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엄마는 계속 시를 쓰고 있다/ 엄마가 엄마 얘기 글로 쓰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자꾸 엄마 얘기를 쓰게 된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일기 같지도 않았다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디자인이음, 2019)

작품이 발표되면 그 평가가 뒤따르고 작가 또한 그 평가를 기다린다. 허나 평석이나 비평은 항상 호의적이진 않다. 문인은 자존감이 높고 자부심이 강한 편이다. 해서 창의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문인은 조언이나 비판을 잘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 독기마저 없다면 금전만능 사회에서 돈벌이가 시원찮은 문학 활동을 지속할 수 없을 터다. 약간의 나르시시즘과 작품에 대한 애정은 창작의 산고를 견뎌내는 깨소금이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문학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이나 음악 등 다른 문화예술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이해부족의 결과라며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섣부른 비판은 후유증을 초래한다. 다혈질인 사람은 격분해 자해를 하기도 하고 비판한 사람을 인신공격하기도 한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고 최북은 자신의 눈을 찔렀다. 그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개 적개심을 갖고 삐치기 마련이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주부라고 쉽게 보고 자작시에 섣불리 입 댔다간 큰 코 다친다. 어머니는 딸에게 웬만해선 토라지지 않지만 자존심 상한 시인은 이미 어머니가 아니다. 시인은 지적질하는 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단단히 삐친다. 묵은 편견을 버리고 진중히 읽어야 바른 시심을 찾는 법이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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