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이 끝이 아니다

발행일 2021-10-19 14:22:5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전쟁의 역사는 길다. 씨족 단위로 모여 살던 원시사회에서도 씨족 간의 전쟁은 일상처럼 돼 있었다. 땅을 지키고 식량과 여자를 지켜내기 위해서 습격해오는 다른 씨족과 싸워야 했고 살기 좋은 땅을 차지하고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며 종족을 번성시킬 여자를 확보하기 위해 이웃 씨족들을 공격해야 했다. 원시인류의 삶은 살기 위한 전쟁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은 인류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현대라고 해서 그 근본 구조가 달라졌다고 보긴 힘들다. 인류의 지적 능력이 진화하고 생활수준이 많이 나아졌지만 전쟁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인구가 는 만큼 전쟁의 규모가 훨씬 더 커지고 그 방법도 복잡다기해졌다. 전쟁수행을 위한 재화와 인력 수요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가공할 신무기를 개발한 결과 전쟁은 애먼 이웃나라에까지 피해를 주게 됐다. 국가 간 동맹관계를 비롯한 외교관계가 복잡하고 국제연합이 버티고 서서 브레이커 역할을 하고 있는 관계로 대놓고 다른 나라를 도발하기 어려운 환경이 새롭긴 하다.

그렇다고 모두 전쟁을 포기한 건 아니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군대를 유지하고 신무기 개발 경쟁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결코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동북아는 전쟁 못지않은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한반도는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알 수 없는 화약고다. 호전적인 비정상국가 북한, 전근대적인 중화주의 전제국가 중국, 냉전시대의 악의 축이었던 통제 불능한 러시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전범국가 일본, 세계의 초강대국 패권국가 미국 등 어느 하나 만만한 곳이 없다.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없는 환경이다.

긴 안목에서 볼 때 지금의 평화는 전쟁과 전쟁 사이에 낀 긴장상태일 뿐이다. 언제든 균형이 깨어질 수 있다. 종전선언은 어쩌면 긁어 부스럼이다. 6·25전쟁을 마무리하자는 선의는 인정하나 생각이 짧고 비현실적인 제안이다.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만 한다고 평화가 오진 않는다. 종전선언은 그 실질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실효성이 있다. 실효성 없는 종전선언은 균형을 깨는 단초로 작용할 수 있다. 위험부담이 크다. 그래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고 그 실질적 조건을 따져볼 가치가 있다.

승패가 나야 전쟁이 끝난다. 그런데 6·25는 승자도 패자도 불명확하다. 어정쩡한 상태로 봉합할 수도 있겠지만 전쟁의 성격과 경과 및 결과를 확정지어야 한다. 개전한 쪽을 규명하고 전쟁 책임을 물을 전범을 밝혀야 하며, 전쟁 당사국의 영토와 전쟁 피해를 확정짓고 그 피해 배상에 관한 구체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6·25는 내전으로 시작했으나 연합군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비화한 데다 휴전 후 68년의 세월이 경과했기 때문에 전쟁 관련자들이 대부분 사망해 진상조사가 쉽지 않다. 종전협정이 순조로이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분란만 자초할 수 있다.

전쟁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의 구성원이 단일민족이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현 분단 상태를 전제로 종전한다는 것은 상호간 독립국가를 교차 승인한다는 의미다. 통일을 포기하고 분단을 고착화하는 ‘동일민족 이국체제’로 가는 국민적 합의가 남북 양쪽 모두에 요구된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대한민국 헌법상 영토 조항을 변경해야 함은 물론이다.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하는 원 포인트 개헌도 못하는 판에 국가의 정체성을 바꾸는 개헌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모르긴 해도 북한도 녹록치 않을 것이다.

종전협상은 첫 단추부터 어긋나기 십상이다. 현 정권은 북핵 폐기를 유도하는 수단으로 종전선언과 전작권 환수, 미군철수라는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지만 미국은 북핵 폐기를 조건으로 종전선언 등을 고려하는 듯하다. 본말이 뒤바뀐 상호대립구조다. 종전선언, 미군철수, 한미동맹 파기를 통해 남한을 적화하자는 복심을 가진 북한은 내심 미소 짓고 있을 터다. 북한은 편들어준다고 평화를 지켜줄 순진한 나라가 아니다. 남북의 동상이몽이 딱하다. 미국이 북핵을 인정하거나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종전 선언 움직임은 보여 주기 외교 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북핵 폐기가 대북정책의 알파이자 오메가라는 사실을 정작 모르는 걸까. 잘 모를 땐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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