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바람 소리가 영혼의 울림처럼 투명하다. 사계절 마르지 않고 흐르는 자계천을 따라 너럭바위가 세월의 깊이를 보듬는 녹음의 호위를 받으며 깔려 있어 선계에 온 듯 신비롭다. 회재 이언적이 이름 짓고 퇴계 이황이 새겼다는 세심대가 선명하다. ‘용추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린 후에야 학문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에 경건해진다.

옥산서원이 눈앞이다. 유생들의 바른 생각이 계절의 붓끝으로 뚝뚝 묻어난다. 자연의 성정을 그대로 닮아 정결하고 단아한 자세로 학문에 전념했던 이언적의 뜻을 기리고 배향하기 위해 서원은 세워졌다. 이언적은 거울이다. 거울은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오직 맑음을 취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어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곧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학문에의 깊은 연륜이 눈을 뜨고 자부심으로 빛나던 이언적의 눈망울에서 번득이는 칼날을 읽는다.

당쟁과 사화로 얼룩진 조선의 병폐를 ‘인’으로 치유하며 진리가 실현되는 이상 사회를 꿈꾸었지만 당대 실세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이 되어 독락당으로 내려와 학문에 정진한다. 독락당은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해 헛기침만 하는 사직의 틈바구니에서도 붓을 잡고 한 길을 가던 이언적의 선명한 몸짓을 똑똑히 기억한다. 후에 재등용이 되어 승승장구하지만 을사사화, 정미사화로 모함을 받아 강계에서의 유배 생활 끝에 생을 마감한다. 나는 지금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찾아 자신의 내면을 가꾸는 데 힘쓰며 도덕적 이상 국가 실현을 위해 직언을 서슴지 않던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다.

서원은 정문인 역락문으로부터 누각 무변루, 강학 공간 구인당, 사당 체인묘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으로 중심축을 이루는 전형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공간과 공간이 엇물려 조화를 이루며 겹쳐지는 지붕 선을 따라 토담으로 이어진 풍광이 자연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던 이언적을 쏙 빼닮았다.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취했다는 역락문이다. 학문의 중심지라는 긍지를 느끼며 찾아온다는 서원 안으로 발을 딛는다.

문득 많은 토지를 헌납해서 서원을 세우는 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얼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규제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언적의 후손이 떠오른다. 서원 출입을 하기까지 역락문을 가로막는 유림 세력에 맞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끝이 없는 싸움을 했을까. 절망이 뼛속까지 박혀도 제 몸의 영혼을 한 올씩 뽑아 짓무른 일상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붓끝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넘어질 때마다 아려오는 상심의 중량이 숨을 막아도 멍든 가슴 저만치서 솟구치는 의기에 나이 들수록 황폐해 가던 내 두뇌의 심지에도 불꽃이 일고 있다.

그래서인지 누각 무변루의 두툼한 판벽 앞에서 왠지 모를 긴장으로 몸이 움츠러든다. 저리도록 아픈 폐부를 뚫고 들어와 메아리의 주문으로 하늘 문을 두드리던 간절함에 가슴이 먹먹하다. 유난히 낮게 만들어진 문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가는 것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경고 같아서 씁쓸했지만 한 편으로는 학문하는 사람은 늘 겸손해야 한다는 다짐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아 아이러니칼하다. 숨을 죽인 채 밑으로 난 계단을 딛고 올라가자 햇살 품은 마당이 바람과 함께 마음을 달래준다. 시작도 끝도 없는 태허의 상태를 의미하는 무변루 의미가 무색하다. 교감과 소통을 위한 개방적 장소인데 길이 없는 것처럼 답답하다. 처마 아래쪽에 걸려 있어야 할 편액도 2층 대청의 안쪽에 걸려 있다. 보통의 누각은 밖을 향해 열려 있는데 무변루는 외부 쪽으로는 판벽을 설치하고 판문을 달아 트임을 제한하고, 구인당 쪽은 트이게 하여 철저하게 내부 지향적인 공간구성이다.

마당 너머로 옥산서원의 편액과 함께 구인당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감았다.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시중을 들며 ‘구인록’을 비롯한 성리학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운 서얼 아들 이전인이 다가온다. 어쩌면 아들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해 독락당 및 많은 유산을 물려주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한 이언적의 배려가 조선 사회의 옹벽과도 같았던 서얼 철폐의 시발점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일상은 지금도 스물네 시간 시계 불량으로 믿음 없는 속살이 버짐처럼 피어나고 턱 밑까지 빈곤의 물이 차오르고 있다. 주인 잃은 활주로에서 절망으로 이륙의 날개를 접고 있을 즈음 만난 그의 흔적은 그리움의 빛이며 거울이다.

구인당이 가까워지자 조급한 마음에 얼른 올라간다. “천만 권 경전과 서적들이 오로지 인을 떠들고 있으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고 개탄하던 이언적, 구인당은 ‘인을 구하는 데 있다’는 성리학의 요체로 그가 추구하던 학문의 핵심을 이르는 말이다. 이언적은 조선시대 가장 미천하게 취급을 받았던 승려들과도 신분을 뛰어 넘어 교류하고 토론했다. 권위보다는 선비로서의 갈 길을 정하고 치국평천하의 가치를 실천하며 주리론을 새롭게 정립하여 도덕적 가치를 강조한 퇴계 이황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해 준 성리학의 선구자였다. 박인로는 이언적의 학문을 “도학의 맥과 공부의 과정이 해와 달같이 밝아 어두운 밤길의 밝은 촛불 잡고 가는 듯하다”고 극찬했다.

유배지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던 그는 늘 책과 거울을 곁에 두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다. ‘서경’을 통해 “책 읽으면서 내 마음 바로 잡고, 거울 보면서 내 모습 바로 잡는다. 책과 거울이 항상 앞에 있으니 잠시도 바른길에서 멀어질 수는 없다”며 자신을 다잡았다. 우주의 중심에서 멀어져만 가던 눈빛을 곧추세워 수십 년 동안 떼지 못한 계급장을 날려 버리고 나만의 자유를 갈망한다. 거울과 책을 보고 자신을 다잡고 제 갈 길을 간 이언적처럼 그가 걸어온 길을 신념으로 생각의 날개를 달아 본다.

학문의 출발은 격물치지라 했다. 옥산서원은 끝없이 기회의 문을 두드리며 이언적이 걸어온 길을 거울로 삼아 바른길을 가고자 하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 장자크 루소는 ‘에밀’을 통해 자연에 순응하는 교육, 선한 본성을 잃지 않는 교육만이 참된 인간성을 형성한다고 설파했다. 그보다 200년 이상 앞서 학문을 익혀 이성을 밝히고 자연과 교감하는 천인합일의 지혜를 갈망하며 본성에 가까운 앎을 실천한 학자가 이언적이다. 옥산서원은 오늘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인간됨의 모태이다. 어둠의 파편이 하나, 둘 재로 쌓이고 두 손 불끈 쥐어지는 예감에 투명한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은빛 날개를 파닥인다.

이언적의 마음을 탐독하며 서원을 나서는 마당의 햇살이 어찌나 눈부시던지 발걸음이 근심을 털어낸 듯 가볍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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