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33>진흥왕

발행일 2021-10-04 13:53:4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복군주 진흥왕 신라 최대 영토 확보…흥륜사에서 43세로 생 마감

신라 24대 진흥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정복전쟁을 벌이는 한편 황룡사를 건축해 장륙존상을 세웠다. 1238년 몽고전쟁 때 불에 타고 대좌석만 남아있다.


법흥왕에 이어 왕위를 이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으로 불렸다. 7세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 어머니의 섭정으로 왕의 수업을 했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기반을 닦은 정복군주로 성장해 신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법흥왕과 진흥왕 당시에도 신라는 귀족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는 기조를 보이고 있다. 진흥왕이 불교를 활성화하며 황룡사를 건축하고, 화랑을 육성해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전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했지만 결국 귀족세력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가장 두드러지는 귀족들의 영향력은 세자 책봉에 이어 차기 왕권을 물려주는 권한 행사에서 나타났다. 진흥왕은 맏아들인 세자가 죽자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지만 귀족들이 둘째 아들을 진지왕으로 앉혔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흥왕도 흥륜사에서 승려의 신분이 되어 43세의 젊은 나이에 석연찮은 죽음을 맞았다.

신라의 뿌리깊은 귀족정치는 귀족 가문간 그리고 왕과의 견제를 통해 박혁거세 61년, 남해왕과 유리왕 등이 21년, 33년, 24년 등으로 길게 이어지는 왕위 세습을 가능하게 했다.

진흥왕도 법흥왕 26년에 이어 36년 동안 길게 왕위에 있으면서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을 측근에 두고 귀족들을 경계하며 적절하게 왕권강화 정책을 쓰면서 왕의 권한을 행사했지만 결국 귀족들에게 퇴출 당했다.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장륙존상 삼존불과 10대 제자들의 모습.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조성돼 있다.


◆진흥왕

540년 귀족들의 추대에 따라 7세에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라고 불렸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이다. 법흥왕이 삼촌이자 외할아버지가 되는 관계다.

진흥왕은 할아버지 지증왕과 아버지, 삼촌 법흥왕의 혈통을 이어받아 신체가 건장했다. 타고난 무골체질에다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무술을 익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장군다운 왕의 풍모를 갖췄다.

진흥왕은 7세부터 왕위에 올라 어머니가 실질적인 나라의 왕 노릇을 하는 동안 귀족들의 세력에 휘둘려 힘들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어린 진흥왕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하면서 힘을 키웠다.

18세가 되면서 친정을 하며 나라의 연호를 개국으로 정하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영토로 확보하고 대가야를 정복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귀족들을 전쟁터에 앞세워 죽령을 넘어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창녕비, 북산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의 순수비를 세우며 신라 최대의 영토를 확장했다.

황룡사는 신라시대 당시 왕궁과 가까운 곳에 진흥왕 14년부터 선덕여왕 14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조성한 큰 절이다. 1976년부터 8년간의 발굴조사에서 4만여 점에 이르는 역사문화유물이 드러났다. 황룡사 금당터.


진흥왕은 이사부와 거칠부를 가장 가까이에 두고 정복 전쟁과 국사 편찬 등의 나라를 경영하는 우군으로 삼았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인재 육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법흥왕 때부터 마련된 화랑제도를 활성화 시켜 신라를 이끌어가는 무열왕, 김유신, 관창, 죽지랑, 원효, 원술랑, 경문왕 등의 뛰어난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창구로 만들었다.

진흥왕은 또 불교를 육성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신라 최대의 국찰 황룡사를 짓고, 불법을 장려해 자장, 원효, 의상, 원광, 양지, 진표, 심지, 혜공, 혜통, 경흥, 낭지, 혜현, 표훈 등의 걸출한 승려들을 배출해 나라의 법통을 이어가게 했다.

그러나 중앙집권식 절대적인 왕권강화에 나섰던 진흥왕도 귀족들의 세력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43세의 나이에 흥륜사의 승려가 돼 후계구도조차 의지대로 하지 못하고 쓸쓸히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황룡사는 남문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일탑식 배치를 보이고 있지만 금당 좌우에 금당을 배치해 1탑 3금당의 독특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 마련

진흥왕의 가장 큰 업적은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영토확장이다. 왕권을 강화해 안정적인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귀족세력들을 친화정책으로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지증왕 때부터 장군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사부와 거칠부를 정복전쟁의 선봉장으로 삼는 한편 국사 편찬 등의 국가대계를 마련하는 인재로 등용했다.

진흥왕은 전쟁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다. 연접한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동향을 철저하게 파악 분석했다.

가장 먼저 형제의 연을 맺고 있던 백제의 허술한 곳을 공격해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기름진 영토를 확보했다.

이어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는 등 서로 치고받는 전쟁을 벌여 지친 틈을 노려 이사부 장군을 앞세워 백제와 고구려의 두 성을 모두 빼앗았다.

황룡사 강당 뒤편에 동서로 이어지는 담장터.


거칠부를 대동해 고구려로 진격해 10개군을 빼앗는 등 본격적으로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진흥왕은 계속 북진정책을 펼치며 고구려를 공격해 함경도,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 비열흘주, 북한산주 등을 설치하며 신라시대 최고의 영토를 확장했다. 진흥왕이 확보한 땅에는 북한산비, 창녕비, 함초령비, 마운령비 등의 순수비를 세워 넓은 지역의 백성들을 다스렸다.

진흥왕은 전쟁으로 확보한 지역의 백성들에 대한 포용정책을 펼쳤다. 세금을 면제해주고, 죄지은 죄인들을 용서해주는 한편 귀족들의 자녀들을 정복한 땅에 이주해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등의 융화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진흥왕의 전략으로 귀족세력은 크게 분산되고 왕권에 대한 견제는 자연스럽게 옅어졌다.

대가야도 완전히 정복해 신라의 문화를 더욱 섬세하고 아름답게 발전시켰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황룡사 금당 뒤편에 깊은 우물터가 남아 있다.


◆진흥왕의 죽음

진흥왕은 타고난 무인의 기질로 귀족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복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궁궐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세자로 임명했던 동륜에 대한 보살핌도 소홀하게 됐다.

이 바람에 태자 동륜은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여성편력에 소진하다 결국 후궁의 담을 넘다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진흥왕은 오랜 전쟁에 지치기도 했지만 아끼던 태자의 죽음으로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다. 진흥왕은 전쟁에 나가기보다 법흥왕과 아들의 영생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황룡사지 서쪽에 황룡사역사문화관을 설립해 황룡사에 대한 내용들을 재현하고 있으며 진입로에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연화문하대석이 전시돼 있다.


이러한 왕의 기운이 쇠약해진 틈을 귀족들이 파고들었다. 가장 측근이었던 거칠부가 어느새 안방의 주인으로 자리잡은 후궁 미실과 손을 잡고 궁궐 내외부까지 세력을 넓혀갔다.

왕의 보폭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던 미실이 거칠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왕이 죽은 태자 동륜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려는 의도를 꺾고, 다스리기 쉬운 둘째 아들 금륜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거칠부와 미실은 각자의 욕심으로 금륜에게 접근했다. 거칠부는 금륜에게 “왕으로 밀어줄 터이니 나를 상대등에 책봉하라”고 요구했고, 미실은 “당신을 왕좌에 앉게 하면 나를 왕비로 삼아야 한다”고 은밀한 계약을 하고 일을 추진했다.

거칠부는 이미 북벌전쟁의 선봉장으로 참여했던 공로를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국사를 편찬하며 내정에도 깊숙이 참여해 신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흥왕이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 황룡사와 흥륜사를 오갈 때를 기회로 삼기로 했다. 거칠부와 미실은 특히 사역이 좁은 흥륜사 법회에 참여할 때 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황룡사지 북쪽 강당 뒤쪽으로 기초석을 비롯한 다양한 용도로 쓰였던 석재들이 남아있다.


거칠부는 전략가답게 진흥왕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치밀하게 세웠다. 왕이 법회에 참여하는 시간을 계산해 그의 뛰어난 친위부대를 흥륜사의 안과 밖을 철저하게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거칠부는 진흥왕의 호위무사들을 하나둘 제거하고, 자신의 심복들을 호위무사로 심었다. 거사일은 진흥왕이 법흥왕과 아들 동륜을 위해 제를 올리는 날이었다.

진흥왕이 슬픔에 빠져 흥륜사에서 1주일이나 제를 올리는 동안 병사들은 절의 안과 밖을 철저하게 에워쌌다. 이러한 기미를 절의 승려들이 먼저 알아차렸지만 승려들은 아무런 대응책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법회만 열며 동향을 살필 뿐이었다.

진흥왕은 법회를 마치는 쯤에 거칠부의 뜻을 알아차리고 조용하게 물러나기로 했다. 이미 기가 꺾여버렸고, 왕좌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 정복군주로 전장을 누볐던 진흥왕도 선대 법흥왕의 뒤를 따라 흥륜사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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