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25>가난한 여인이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다

발행일 2021-08-02 08:28:55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효종랑과 진성여왕이 효녀의 행실에 감동받아 집과 쌀을 하사



신라 진성여왕 때 분황사 동쪽에 효녀 지은이가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딱한 사정을 알고 화랑 효종랑이 먹을 것을 보내주고, 여왕이 집과 먹을 것을 하사하며 군사들이 지켜주게 했다. 나중에 집을 양존사라 이름 지어 운영했다. 양존사지로 추정되는 분황사 동쪽의 구황동 폐사지.


빈녀양모, 가난한 여인이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다로 해석되는 제목의 설화는 삼국유사 139가지 이야기 중 마지막에 소개되는 글이다.

삼국유사에 소개되는 이야기들은 삼국사기를 비롯해 많은 사서와 기록을 참고해 작성됐다.

그래서 유사에 소개되는 글들은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들과 비슷한 내용이 많다.

특히 유사의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빈녀양모는 사기와 설화들을 소개하는 기록과 유사하다.

삼국유사에서 가난한 여인으로 등장하는 효녀는 다른 기록에 의하면 지은이라는 이름이 있고, 결혼하지 않은 32세의 노처녀로 눈먼 어머니를 봉양한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부유한 집에 몸을 팔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에 모녀가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을 유사에서는 화랑 효종랑이 부하들에게 보고를 들어 알게되지만 사기에서는 직접 목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효녀 모자가 살던 집은 분황사 동쪽에 위치해 있고, 그 마을을 효양리라고 부르게 했다. 또 왕이 하사해 살던 집을 나중에 절로 삼아 양존사라고 했다. 지금 분황사 동쪽 가까운 곳에 구황동 절터가 있어 이곳을 양존사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3년에 걸쳐 진행해 온 삼국유사 기행은 사실상 모두 마무리하게 된다.

다음호부터는 신라의 국가로 출발하는 시점에서 삼국과의 대립, 통일신라로 우뚝서서 최고의 문화발전을 이룩하는 정점의 신라에서부터 왕권다툼으로 점철하며 천년사직이 패망하는 순간까지 1천 년의 역사를 20회의 이야기로 스토리텔링한다. 순수하게 삼국유사를 새롭게 써본다.

분황사 동쪽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구황동 폐사지에 석탑 옥개석과 사천왕상 등의 석재가 쌓여 있다. 길 건너편에 황룡사와 분황사가 있다.


◆삼국유사: 가난한 여인이 어머니를 봉양하다

효종랑이 남산의 포석정에서 놀고 있을 때 문객들이 급히 달려왔는데 두 사람만이 뒤늦게 왔다.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들이 길게 상황을 보고했다.

‘분황사 동쪽 마을에 나이 20세 전후의 여자가 눈 먼 어머니를 껴안은 채 서로 목 놓아 슬프게 울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이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해 먹을 것을 구걸하며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한 지가 몇 년이 됐습니다.

마침 흉년이 들어 문전걸식으로 살아가기 어렵게 되자 다름 사람에게 몸을 팔고 곡식 30석을 얻어 주인 집에 맡겨 놓고 일해 왔습니다. 날이 저물면 자루에 쌀을 넣어 집으로 와서 어머니께 밥을 지어드리고 어머니와 잠을 잔 뒤 새벽이면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지 며칠 만에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지난날에는 거친 음식도 마음이 편안하더니 요즘에는 좋은 쌀밥을 먹어도 마음 속을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여인이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그의 모친이 통곡했습니다.’

신라 효녀 지은이를 처음 도와준 화랑 효종랑이 병사들에게서 지은이의 효성을 듣게 된 포석정 입구.


그들은 “여인은 먹는 것만 보양할 줄 알았지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것 입니다. 이걸 본다고 늦었습니다”고 보고했다.

효종랑이 눈물을 흘리며 곡식 100곡을 보냈다. 효종랑의 부모 또한 옷 한 벌을 보냈으며 효종랑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도 벼 1천 곡을 거둬 보내 줬다.

이 일이 대궐에 알려지자 당시의 진성여왕이 곡식 500석과 아울러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병사들을 보내어 그 집을 지켜 약탈 당하는 것을 막게 했다.

그 마을을 표창하해 효양리라 했다. 그 뒤에 집을 희사해 절로 삼고 양존사라고 했다.

화랑 효종랑과 화랑들이 훈련을 하고, 작전회의와 위로연을 베풀기 위해 모였던 포석정. 유사곡수로 지금도 풀리지 않는 기하학이 숨어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효종랑의 결심

신라 제51대 왕은 진성여왕이다. 경문왕의 아들 딸들이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으로 3남매가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

진성여왕은 각간 위홍을 위주로 향가를 책으로 펴내게도 했지만 나중에는 귀족들의 세력에 의해 물러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진성여왕은 집권초기와 다르게 화랑들과의 문란한 내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충신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반란이 일어나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고통스러워졌다.

도적들이 곳곳에서 들끓어 왕궁이 있는 서라벌 변두리까지 약탈을 일삼는 일이 벌어졌다. 백성들은 물론 힘이 약한 관리들조차 도적들의 공격을 두려워하게 됐다. 탐관오리들은 권력에 빌붙어 세금을 거두어 상납하며 더욱 높은 자리를 탐하는 한편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바빠 백성들의 어려움은 갈수록 더했다.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자 백제와 고구려 등의 접경지역에서 군사적 도발이 심해져 신라의 국력은 삼국통일 이후 가장 쇠약하게 됐다.

이때 경문왕의 아들이었던 헌강왕과 정강왕은 아들이 없자, 진성여왕이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여왕 또한 아들이 없어 후사를 잇기에 귀족들이 나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다.

사적 제1호로 지정된 포석정 주변에는 오륙백년을 넘은 것으로 짐작되는 고목들이 있어 사적지로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효종랑은 화랑의 우두머리로 매우 영민하고 용맹스러우며 충성스러웠다. 효종랑은 헌강왕의 사위로 왕위를 이을 가장 우선 순위에 있었다.

그러나 궁중에 실력자로 군림하던 김예겸이 진성여왕에게 궐 밖에서 아이를 데려와 헌강왕의 아들이라며 요를 추천했다. 요는 헌강왕이 고성숲에 사냥을 나갔다가 현지에서 만난 여인이 낳은 아이다.

김예겸은 자신의 딸을 요에게 시집을 보내 실력자로 등극하게 된다.

진성여왕은 요의 등뼈를 만져보고 아래 두 마디가 툭 불거져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오빠인 헌강왕의 아들이 맞다며 자신의 뒤를 이어 52대 효공왕으로 왕위를 잇게 했다.

김예겸이 효공왕을 진성여왕에게 추천하기 전 효종랑은 엉뚱한 고민에 휩싸였다. 화랑들과 사냥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우물가에서 수려한 미모를 가진 여인을 만나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당시 나라는 전쟁과 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 있었고, 권신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내분을 일삼으며 백성들의 어려움은 헤아리지 않았다.

경주 포석정은 신라 55대 경애왕이 연회를 베풀다 후백제 견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곳이라는 설화가 전해지는 사적지로 맥문동 등의 화초가 공원을 이루고 있다.


효종랑은 화랑의 우두머리이자 공주의 남편이라는 신분으로 막중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전쟁터로 달려나가야 할지 대신이 돼 내정을 바로잡는 일에 뛰어들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이러한 때에 아름다운 여인에 마음이 혹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졌다. 그러나 마음속의 갈등을 감추고 그 여인에 대해 은밀히 알아볼 것을 부하들에게 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지은’ 이고, 아버지는 일찍 죽고 눈이 먼 홀어머니를 모시며 늦은 나이에 결혼도 미루고 사는 효성이 깊은 착한 여인이었다. 더욱 딱한 것은 지은이가 연이은 가뭄으로 나라 전체가 어려움에 허덕이게 되자 일거리가 없어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부잣집 종으로 몸을 팔아 양식을 얻어 살게 됐다는 것이다.

효종랑은 스스로 지은이를 위해 쌀 100섬을 상으로 보내고, 왕에게 보고해 집을 하사하게 했다. 진성여왕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고자 매년 쌀 300섬씩을 상으로 주고, 도적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군사들이 집을 호위하도록 했다.

포석정은 신라시대 연회장으로 추정되었다가 사학자들의 사당으로 기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포석정 동쪽 경계 담장.


왕은 또 새로 지은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워 효양문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을 그때부터 효양리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지은이는 신분도 양민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게 됐다. 어머니가 매일 맛난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했다. 한편 지은이는 자기 모녀가 이러한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은 모두 효종랑의 은혜라 생각하고, 효종랑을 마음 속으로 사모하며 서방으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

효종랑은 예겸이 요를 헌강왕의 아들이라며 궁으로 데려와 왕위를 이을 준비를 서두르는 모습을 보고, 권력에 염증을 느끼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기로 했다.

효종랑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평화롭게 사는 지은이의 모습을 보려고 부하들에게 출정식에 앞서 고성숲에서 사냥대회를 열라고 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효종랑은 지은이를 처음 만났던 우물에 이르러 물을 청했다.

그때처럼 지은이는 여전히 하인을 시키지 아니하고 어머니의 빨래는 손수하며 밥도 직접 지어 봉양하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효종랑을 만나 바가지 가득 물을 떠서 바쳤다.

사적 제1호 포석정은 연회와 사당 등의 기능으로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사당터로 보이는 건물터가 드러났다.


그리고는 “제 평생 랑의 은혜를 잊지 않고, 마음의 지아비로 삼고 어머니를 모시며 혼자 살아가겠습니다”고 말하고는 크게 세 번의 인사를 올렸다.

효종랑은 당황하면서 “처녀의 고운 마음씨가 하늘을 움직여 돌보게 한 것”이라며 “신라 여인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고, 나라를 위해, 백성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전쟁터로 나갑니다”며 답하고 물을 한숨에 마셨다.

효종랑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고, 지은이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 살던 집을 어머니와 효종랑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로 바꿔 양존사라 이름 짓고 절에서 생을 마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해석은 고운기의 ‘삼국유사’, 이범교의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등을 참고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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