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대구·경북 한 바퀴)<24>대구 중구||근현대 역사의 흔적 곳곳에,

▲ 대구 중구 청라언덕에 위치한 3·1만세운동길의 야경 모습.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도심으로 모이기 위해 지나다녔던 길이다.
▲ 대구 중구 청라언덕에 위치한 3·1만세운동길의 야경 모습.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도심으로 모이기 위해 지나다녔던 길이다.
대구는 조선시대부터 경상지역(경상남·북도)의 정치·군사·경제 중심지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구국운동의 터전이었으며, 우리나라 민주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2·28 운동의 산현장이기도 하다.

대구의 중심인 중구에는 그 자랑스러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골목마다 스민 역사와 삶의 정취는 대구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숨은 원석이며, 감성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토리 그 자체다.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에 머물며 ‘올드 앤 뉴’(Old&New)의 매력적인 조화가 빛나는 곳,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 만나는 빛나는 역사 현장, 빛바랜 고서 속에 살아 움직이는 오늘의 시간을 알려 주는 곳이 바로 중구다.

올여름 휴가는 멀리서 찾지 말자. 대구 도심의 잊혀진 이야기를 찾아 중구 골목을 혼자서 뚜벅뚜벅 누벼보는 것은 어떨까.

▲ 청라언덕에 있는 옛 미국인 선교사의 저택. 현재 의료선교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청라언덕에 있는 옛 미국인 선교사의 저택. 현재 의료선교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이름만큼이나 푸르른 청라언덕

청라언덕은 달성토성의 동쪽에 있어 ‘동산’이라고도 불렸던 작은 언덕이다.

동산의 언덕배기가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당시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왔던 미국인 선교사들은 이곳에 터를 잡았다.

여름철 대구의 무더위는 그들에게도 꽤 고역이었나 보다. 선교사들은 집집마다 볕을 식혀주는 담쟁이덩굴을 심어 올렸고, 100년이 지나 이곳은 그 이름만큼이나 푸른 ‘청라언덕’이 됐다.

청라언덕에는 3채의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 남아 있다. 당시 선교사들의 이름을 딴 스윗즈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이 그것이다. 복잡한 도심 속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고요하게 자리 잡은 그림 같은 자태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올 것이다.

1907년 친일파 대구부사 박중양과 일본 상인들에 의해 허물어진 성곽돌의 일부가 선교사 주택의 주춧돌로 활용됐다. 현재도 그 성돌을 볼 수 있다.

주택은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유행한 방갈로 형태를 띠고 있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2층 양옥집 머리 위에 자리 잡은 한국식 기와의 모습을 보노라면 동서고금을 아우른 그 시절 선교사들의 지혜로움이 느껴진다.

그들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잘 보존된 저택들은 대구유형문화재로 지정돼 현재 선교, 의료, 교육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이 잠들어 있는 작은 묘지 ‘은혜의 정원’ 앞에서는 부산을 떨며 지저귀던 새들도 잠시 숙연해진다. 선교사의 낡은 비석에는 “I’m Going To Love Them(나는 그들을 사랑하겠노라)”라고 써 있다. 타국에서 맞이한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이 땅의 백성들을 떠올린 숭고한 사랑 앞에선 절로 고개가 수그러진다.

▲ 한때 대구 최고의 부촌이었다는 진골목의 담벼락.
▲ 한때 대구 최고의 부촌이었다는 진골목의 담벼락.
◆살아 있는 근대 골목박물관, 진골목

한때 대구 최고의 부촌이었던 진골목은 ‘길다’의 경상도 사투리 ‘질다’에서 기원했다.

조선 시대부터 존재했던 골목으로 1903년 대구읍성이 있었을 당시 지도에서도 나타나 있다. 종로 뒤편에서 경상감영으로 이어지는 긴 길이었지만 현재 100m 남짓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구 토박이 달성서씨 부자 서병국과 그의 형제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정소아과 의원으로 남아 있는 건물은 1937년 민간 자본으로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주택으로 서병직의 저택이었다. 당시 대구 최고의 갑부 서병국이 살았던 저택은 현재 화교협회로 활용되고 있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등 한때 대구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이 골목에서 살았다.

현재 진골목은 대구 근대 부자들의 가옥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골목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진골목에서 부자의 기운을 잔뜩 받고 오는 것은 어떨까.

▲ 대구 중구청이 제작한 근대골목 AR투어 안내도.
▲ 대구 중구청이 제작한 근대골목 AR투어 안내도.
◆나 혼자 뚜벅뚜벅, 근대골목 AR투어

대구 골목투어의 정수인 근대문화골목을 증강현실(AR)로도 만날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 ‘대구근대골목 AR’을 내려받으면 된다. 증강현실과 가상현실(VR)을 활용한 관광콘텐츠를 통해 혼자서도 재미있게 골목을 즐길 수 있다.

청라언덕에선 톡톡 튀는 대구 마스코트 ‘도달쑤(도시 달구벌 수달)’를, 3·1 만세운동길에선 1919년 만세운동 현장을, 진골목에선 골목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으며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AR·VR 영상존에 들어가면 같은 장소에서 100년 전, 500년 전 과거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실감 나는 역사공부와 함께 여행 안내도 받아 보자.

▲ 대구의 떠오르는 핫플레이스 김광석길. 김광석길에선 사시사철 그의 명곡들이 흘러나온다.
▲ 대구의 떠오르는 핫플레이스 김광석길. 김광석길에선 사시사철 그의 명곡들이 흘러나온다.
◆감성 뿜뿜, 김광석 다시그리기 길

중구의 한 오래된 시장 끝 담벼락에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가객 김광석을 기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김광석은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까지 살았다. ‘사랑했지만’,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바람이 불어오는 곳’,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등 그가 남긴 명곡들은 시대를 초월해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2009년 11팀의 작가들이 김광석 길 조성을 위해 뭉쳤고, 골목 곳곳의 벽은 가수 김광석의 노랫말과 그에 맞는 그림들로 채워졌다.

▲ 감성 충만한 김광석 다시그리길의 골목 풍경.
▲ 감성 충만한 김광석 다시그리길의 골목 풍경.
살아생전 김광석이 기타 하나, 목소리 하나에 혼을 담아 생명을 불어넣었듯 보잘 것 없던 콘크리트 담벼락과 낡은 골목도 김광석의 삶과 음악을 표현한 작품들로 다시 생명을 얻었다.

이 길에 꾸며진 ‘김광석 스토리하우스’는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김광석과 함께하는 자리이다. 다채롭게 마련된 이색적인 체험공간에는 김광석이 남긴 노래, 유품, 콘서트 영상 등이 가득하다.

골목에선 항상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와 특별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만으로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골목의 어느 술집에서 맥주 한 잔 기울이는 것도 좋겠다.

▲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상징 성모당.
▲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상징 성모당.
◆치유의 성지, 남산100년 향수길

남산100년 향수길이 있는 남산동은 최근 재건축 붐과 함께 천지개벽하고 있는 곳이다. 번화한 도시 속 숲길을 헤쳐 나오면 눈 앞에 펼쳐지는 고요하고 장엄한 광경에 탄성이 절로 나올 것이다. 교구의 수호성인 루르드의 성모께 봉헌된 성지이자, 대구대교구를 상징하는 성모당이 그림처럼 나타난다.

1918년 드망주 주교는 세 가지 소원을 이룬 약속대로 교구청 내 가장 높고 아름다운 장소에 성모당을 지었다고 한다. 100년이 지난 현재 주위의 많은 변화에도 성모당은 여전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중구 근대로의 여행 골목투어 5코스인 ‘남산100년 향수길’은 구한말 지역 천주교 문화가 밀집된 공간이다.

▲ 성유스티노신학교 전경.
▲ 성유스티노신학교 전경.
유럽풍 건축물인 성유스티노신학교,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샬트르성바오로 수녀원, 프랑스 루르드 성모 동굴을 본떠 건축한 성모당 등 천주교인에게는 성지순례 코스를, 관광객들에게는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한낮의 햇살도, 은은한 야경 모두 찾는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준다.

▲ 지역 유학의 성지 대구향교.
▲ 지역 유학의 성지 대구향교.
◆대구 유림의 중심지, 대구향교

건들바위에서 북쪽으로 400m가량 떨어진 언덕에는 지역 유학의 성지인 대구향교가 있다.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임춘첩’이 붙은 외삼문을 지나면, 마치 다른 세상인 양 푸르고 평온한 향교의 전경이 펼쳐진다. 그 옛날 운동장 대신 대성전 뜰을 거닐고 명륜당에서 졸음을 찾아가며 공부했을 어린 유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구향교는 조선시대 1398년(태조 7년) 성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을 교육하기 위해 창건됐다. 화재와 재건, 소실과 중건, 이전을 반복하다 1932년 겨우 이곳에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서당공부를 마친 16세 이상의 학생이 입학해 유교를 바탕으로 학문과 사상, 그리고 예를 배웠다고 한다.

토담이 길게 뻗어 좌우를 구분한다. 좌측에는 명륜당, 낙육재 등 비교적 최근에 지은 건물들이 있으며, 우측에는 대성전(대구시 문화재자료 제1호)이 있다.

현재 향교는 한문 교육이나 예절 교육 등 전통교육과 전통혼례의 장소로 남아 지역사회 유학의 명맥을 잇고 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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