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 문화재〈8〉정순임 명창 판소리 흥보가

발행일 2021-06-13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66세의 늦은 나이에 경북 무형문화재 제34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지정

대를 이어 내려오는 판소리 명문가의 자손, 청각 2급 장애에도 소리에 대한 고집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흥보가’와 경북 무형문화재 제34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인 정순임 명창.
취송당 정순임(80) 명창은 당시 66세인 2007년 1월18일 경북 무형문화재 제34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지정됐다.

정 명창은 웅장하고 화평한 소리가 특징인 동편제 계열의 흥보가를 전승하고 있다.

흥보가는 소리꾼의 해학이 두드러진다.

그는 대를 이어 내려오는 판소리 명문 집안의 자손이다. 1942년 2월5일 광주 태생으로, 7살 때부터 소리를 시작해 70년 넘게 소리만 해왔다.

정 명창은 2005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 이수자로 선정됐고, 2007년 4월 판소리 유관순열사가 대한명인으로 지정됐다.

2007년 6월에는 문화관광체육부의 판소리명가로 선정됐다.

2015년에는 옥관문화훈장 수훈과 2016 고창 신재효 동리대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6월26일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는 등 국내 판소리 문화예술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를 잇는 판소리 가문의 딸

정순임 명창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판소리 명문가 집안의 후손이다.

판소리 명가로 장판개-장도순-장영찬-장월중선-정순임으로 맥을 잇고 있다.

그의 외가 큰외조부는 장판개 어전명창으로 전남 곡성의 전설적인 판소리의 명문가였고, 장판개의 동생이자 정순임의 외조부인 장도순은 판소리 명창이다.

외숙 장영찬도 판소리 명창이다.

어머니 장월중선(본명 장순애)은 판소리 명창, 가야금 명창이다.

모친은 이미 소리로 저명했다.

장월중선은 전남 곡성군 오국면 묘천리 출생으로, 큰아버지인 장판개 명창 문하에서 1930년대부터 판소리 5바탕 사사하고, 목포 국악원 설립 강사, 경주시 관광요원 교육원 강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 등을 통해 소리가로서 업적을 쌓았다.

정순임 명창은 전남 광주에서 아버지인 정우선과 어머니 장순애 사이의 1남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광주 외갓집에서 자란 정 명창은 부모가 있는 목포로 와 7세에 어머니가 설립한 목포 국악원에서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정순임 명창은 어려서부터(1948~1956) 모친 장월중선 선생으로부터 판소리 ‘심청가’, ‘춘향가’, ‘수궁가’ , ‘흥보가’, ‘유관순 열사가’ 등을 배웠다.

◆모친 ‘장월중선 선생’의 반대에도 소리

음악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나 정 명창은 어머니에게서 자연스럽게 직접 소리를 듣고, 배웠다.

그의 어머니 장월중선은 자녀들이 소리를 배우는 것을 극구 반대하며, 자식들에게 자신의 재주를 물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정순임 명창은 어릴 적 소리를 한다고 어머니에게서 여러 차례 매를 맞았고, 옷을 다 벗긴 채 바깥에서 벌을 선 적도 수차례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었던 정순임 명창은 매일 오전 4시면 고향 목포의 명산 ‘유달산’에 올라 어머니를 피해 귀동냥으로 들은 소리를 마음 놓고 연습했다.

‘적벽가’, ‘춘향가’, ‘수궁가’, ‘흥보가’를 끊임없이 부르던 그의 열정은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게 했다.

1957년 그의 어머니 장월중선 선생은 소리를 위해 전남 보성의 정응민 선생에게 정 명창을 떠나보냈다.

당시 정응민 선생 문하에 입문해 춘향가를 배웠다. 이후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어머니 장월중선 선생을 따라 경북 경주에 경주시립국악원 창악 강사로 활동했다.

남동생 정경호는 국악작곡 장월중선 아쟁 산조 보존회장을 맡고 있으며, 여동생 정경옥은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이수자다.



◆본격 판소리의 꿈 이뤄…흥보가로 명성

정순임 명창은 어머니의 부름에 따라 1972년부터 1974년까지 경주서라벌 국악강사로 활동하게 됐다.

그는 1985년 남도예술제 판소리부문 대통령상 수상과 1997년 KBS 국악대상 판소리부문 수상함으로써 판소리 명창으로 알려지게 됐다.

1989년에는 국립창극단에 입단을 하게 되면서, 어머니 장월중선 소개로 박송희(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선생 문하에 입문을 하게 됐다.

입문 후 송만갑, 김정문, 박록주로 이어지는 동편제 박록주제 ‘흥보가’를 전수 받게 됐다.

1996년 8월31일에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박록주제 흥보가를 첫 완창발표를 중앙무대에 서게 됐다.

이어 1999년 9월25일에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흥보가 두 번째 완창발표회를 갖게 됐다.

2005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박록주제 흥보가 이수자가 됐다.

2015년 9월19일에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판소리 흥보가 세 번째 완창을 중앙무대 공연을 했다.

정순임 명창은 현재 지방에서도 수차례 박록주제 흥보가 발표와 공연을 펼치고 있다.

◆청각 2급 장애, 70년 이상 판소리

정순임 명창은 10대의 아주 어린 시절, 할머니 댁 근처의 강가에서 놀다가 귀를 다쳤다.

당시에는 귀를 고쳐주는 병원이 없어 귀를 다친 채 살아왔다.

하지만 50대의 나이에 판소리 무대에 서기 위해 서울에 올라오게 됐다.

여러 무대에 오름과 동시에 치열한 연습 과정 중 그는 귀에 무리가 와 병원에 가게 됐다.

당시 청각 수술을 해야한다는 의사의 말에 앞으로 그가 좋아하는 판소리를 위해서라도 수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곧바로 수술을 진행했다.

수술 후 담당 의사는 “귀가 낫고, 수술이 회복될 때까지 소리를 하지말라”는 간곡한 당부를 했다.

하지만 그는 무대에 서겠다는 욕심에 창극 무대를 펼치게 됐고 동시에 고막이 터져나갔다.

그는 당시 청각장애 2급 판정을 받은 후 현재까지도 보청기에 의지해 소리를 하고 있다.

오로지 귀에 남은 감각만으로 소리를 해오며 지내온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소리에 대한 열정과 용기 만큼이나 그의 수상경력은 뜻깊다.

2006년 충효문화예술대상 국악지도자부문을 수상하고, 2007년에는 대한민국 청소년(지도자)대상 예술부문 국악대상, 2007년 금복문화상 국악부문으로 상을 거머쥐었다.

2012년 제24회 경주문화상(문화예술부문)과 제17회 포항MBC 삼일문화대상(문화예술부문), 2014년 제1회 선덕여왕대상을 수상했다.

2015년에는 제56회 경북도 문화상, 2015년 제289호 옥관문화훈장 수훈했으며, 2016년에는 파소리 동리대상을 수상했다.

◆고향과 다름없는 경주에서, 판소리 전승에 앞장

정순임 선생이 명창으로서 판소리 흥보가로 국내에서 이름을 떨치는 가운데 1989년 어머니 장월중선 선생이 떠나게 됐다.

당시 정순임 명창은 서울의 국악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살풀이 예능보유자 권명화 선생의 권유로 일성 조인좌 선생의 관광요원교육원에 강사로 초빙돼 경주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못 이룬 판소리 저변확대를 위해 어머니 유지를 받들어 1999년 서울 생활을 접고 경주로 내려오게 됐다.

그는 지역민들의 문화향유 기회를 넓히고, 국내외 관광객들에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경주에서 판소리 전승 교육을 하며, 전국 대학교에 강의를 다니고 있다.

1996년부터 현재까지 동국대 한국음악과와 2000년부터 현재까지 부산대 국악과를 출강 중이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는 목원대 국악과,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중앙대 국악과,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서라벌대 실용음악과를 출강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영남대 국악과, 2006년부터 현재까지 경북대 국악과 출강하는 등 후학 양성에 힘을 보탰다.

또 판소리 저변확대를 위해 창극단 경험을 살려 판소리 공연의 불모지인 창극무대공연도 했다.

2002년 4월 창극 유관순전, 2005년 10월 창극 구운몽, 2007년 7월 창극 흥보전, 2008년 창극 심청전(연꽃에 핀 청아), 2009년 창극 수궁전, 2010년 창극 쌀퍼주고 떡 사먹는 여자(뺑파전), 2011년 창극 수궁전(토끼간이 약 일래라~) 등을 공연했다.

◆정순임 명창 인터뷰

“어머니의 맥을 잇기 위해 경주로 내려와 후학 양성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정순임 명창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단연코 어머니라고 자부했다.

특히 어머니를 따라서 소리꾼의 길로 들어선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는 것.

정 명창은 “예술가로서 최고의 어른이고, 돌아가셨지만 아직까지도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며 “어릴 적부터 듣고 봐온 것이 크다. 자연히 흥얼거리며 배우게 됐고, 무조건 소리가 하고싶었다. 절대적인 어머니의 지지에 내가 이렇게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크지만, 판소리 명창으로서 어머니의 뜻에 따라 후학 양성 및 판소리 저변 확대에 더욱 노력하겠다는 것이 최종 목표다.

그는 “어머니가 국가 무형문화재가 됐어야 했다. 늦었지만 어머니의 한을 푼 것 같다. 이제 할 일을 다한 것 같다”고 웃음 지었다.

정순임 명창은 어머니의 이름을 딴 판소리 경연대회인 장월중선 명창대회를 지난해까지 9회째 개최하고 있다.

또 흥보가 이수를 하며 완창발표회를 가지고, 한 달에 한번은 서울로 올라가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 등 판소리 전승 보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현재 각종 문화단체에서 직책을 맡아 판소리를 알리는데 힘을 싣고 있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전통예술진흥회 경주지회장을 맡고 있다.

또 세천향민속예술단장, 경북무형문화재보존회 부회장, 한국판소리보존회 경북지부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정 명창은 “경북에는 뛰어난 여류명창이 배출된 지역으로, 박록주와 박귀희 선생이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인정돼 우리소리 세계를 이끌어 왔다”며 “나 또한 판소리 전승 보급과 저변확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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