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이냐, 사랑이냐 ~

…처연한 남도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한녹주의 춤사위가 눈에 아른거린다. 살풀이춤의 부드러운 춤사위가 절절하다. 움직이는 듯 멈추는 듯 들어 올리는 바람결 같은 몸놀림은 일품이다. 스물에 입문하여 이십여 년 동안 민속무를 고수해온 집념의 결실일 것이다. 그녀의 춤엔 신선한 신비감마저 묻어난다. 오묘한 춤사위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나는 무용계에 정통한 오규태로부터 한녹주의 내밀한 사연을 듣는 기회를 가졌다. 오규태는 예술성 짙은 고유의 춤 도살풀이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는 한녹주에 관심을 두고서 석운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놨다. 그는 그제야 석운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보남에게서 민속춤을 전수받은 석운은 괴팍하긴 했지만 희대의 명인이었다. 한녹주는 석운의 문하로 들어가서 민속무를 익혀갔다. 장고장단을 익히고 춤을 공부했다. 조금만 잘못해도 장고채로 얻어맞았다. 한해가 가자 요란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유연한 춤사위가 풀려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고수 정수관이 나타났다. 그의 북 솜씨는 뛰어났다. 그날부터 그는 석운 도량에서 북을 쳤다. 한녹주는 처음에는 북소리에 관심이 없었으나 점점 애절한 듯 쓸쓸한 북소리에 매료돼갔다. 정수관의 눈빛이 심상찮게 변하자 북소리마저 그녀 마음을 흩트려 놓았다. 그해 가을, 정수관은 석운에게 한녹주와 함께 떠나도록 허락해달라고 부탁했다. 석운은 단호히 거절했다. 정수관은 거듭 간청했으나 스승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후, 정수관은 환상적인 북소리만 남긴 채 홀연히 떠나갔다. 한녹주는 정수관과 그 북소리를 잊으려고 춤에 더욱 집중했지만 틈만 나면 그 환영이 비집고 들어왔다. 석운은 그 마음을 읽은 듯 한때의 헛된 마음으로 명인의 길을 그르쳐선 안 된다고 타일렀다. 한녹주는 떠나고자 하는 내면의 소리와 명인의 길을 가야한다는 스승의 당부 사이에서 고뇌하였다. 결국 그녀는 명인의 길을 택했다. 한녹주는 석운에게 삼년을 배운 후 성홍심에게 갔다. 그의 춤은 석운과 또 달랐다. 성홍심에게 한해를 머물면서 한이 담긴 특유의 춤을 완성했다. 스물 셋이었다./ 이윽고 한녹주의 춤에 깃든 사무친 애원성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혼을 빼고 몸으로만 추는 춤은 춤 시늉일 뿐이다. 창작을 하더라도 내면에서 우러나는 영혼을 춤사위에 실어야 할 터다. 정수관은 살 의욕을 잃고 여기저기 떠돌다 남원에서 죽었다. 진나라 거문고 명인 사광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광은 기녀의 교태에 빠져 현묘한 가락을 잃어버리지만 어리석음을 깨닫고 쑥불로 두 눈을 지져버린 후 마침내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고사다. 참 유익한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은 기분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한녹주는 춤과 사랑의 갈림길에서 고뇌하지만 결국 예술의 길을 택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민속무의 명인으로 우뚝 서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눈물을 흘리며 포기한 사랑이 춤사위 속에 녹아들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신비롭고 독특한 민속무를 완성한다. 현명한 스승의 결단이 잔인하다. 절절한 북소리의 울림이 춤 명인의 길을 막는다는 두려움에서 두 연인의 사랑을 갈라놓은 셈. 고수와 춤꾼의 기구한 슬픈 사연이 가슴을 저민다. 세월이 지나면 가지 않은 길에 연연해하겠지만 그 어떤 선택도 인간의 미련을 해소해주진 못한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온다.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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