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명희
▲ 정명희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계절의 여왕이 소리 없이 찾아왔다. 오월이다. 여기저기 온 사방에서 결혼 소식이 들려온다. 마음대로 찾아가 축하해 줄 수 없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의 앞날을 축하하며 날씨가 큰 부조하기를 기대한다. 여름을 방불케 하던 따스한 기온은 새로운 결심과 새 출발 하는 이들이 긴장이라도 하라고 일러주려는 듯 며칠 사이 찬바람으로 바뀌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더웠다가 추웠다가를 반복하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 속에서도 유독 한 여인이 꾸준하게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봄볕 아래 벚꽃이 일시에 화들짝 피어나듯 뭉근하던 열기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듯하더니 드디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 칠십 중반이 돼서야 이룬 큰 성공에 세상을 그다지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인 20·30대도 닮고 싶다고 열광하는 것 같다. 이국땅에 사는 한 친구도 아카데미 ‘K그랜마’ 성공담을 아는 대로 기록해 긴 메일을 보내왔다. 인생 후반에 큰 성공을 이룬 원로의 이야기가 마치 자신의 앞날에 대한 기대로까지 여겨지는지 지나온 자신의 인생 곡절과 앞날의 희망 섞인 계획까지 구구절절 덧붙여놨다.

60살 넘어서는 사치하고 살려고 마음먹었다던 그 배우의 말이 오늘따라 가슴에 남는다. 그녀가 말하는 사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것(작품)은 하고, 싫어하는 사람 것은 안 하는 것이다. 돈 그런 거 상관없이 원하는 작품을 하리라’ 였다. 센스 있을 젊은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나이가 들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를 경계하고 편견으로 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녀인 것 같아 귀감이 된다. 그는 또 이른다. “살아온 경험 때문에 많이 오염됐어요. 이 나이에 편견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일흔 살 중반의 여배우에게 세상은 이제야 빠져들지만, 거의 반세기 동안 교류해온 오랜 친구들은 솔직 담백한 윤여정 표 화법에 익숙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아카데미 수상 소감이 윤여정이 밥 먹는 자리에서 수다 떠는 모습과 똑같아서 더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나이 60이 돼도 인생은 몰라,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도 67살이 처음이야,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고, 어떻게 계획을 할 수가 없어,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씩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 나이 들면서 붙잡지 않고” 세계 여행의 유행을 불러일으킨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이 담담하게 하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젊은 날이었다면 그녀의 말이 이렇게 가슴을 울릴까. 나이가 들어가니 지나간 말이 새롭게 되살아나곤 한다.

세계적인 상을 받고서 와인 잔을 옆에 두고서 한 인터뷰 사진이 신문을 장식한다. 그 기사에서 깜짝 놀랄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오래전 미국에서 신생아에 관해 공부하고 귀국해 국내 신생아학의 붐을 일으켰던 유명한 분. 세상 떠나고도 수필 ‘인연’으로 유명세를 이어가는 피천득 수필가의 아드님, 자신의 업적보다는 아버지의 몇째 아들로 소개돼 섭섭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던 원로 교수님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닌가. 여배우의 오랜 지인으로 지면을 장식하는 것으로 놀라는 독자들도 꽤 있었으리라.

까탈스레 보이는 외모와 달리 가까이 지내는 이들의 면면이 참 다양해 놀랍다. 한 전직 국회의원은 50여 년 인연이라며 그녀를 빚지고 못사는 왕 깔끔 성격에 의리파라고 했다.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자기 집에서 신혼여행 첫날밤을 보낸 적이 있다면서 일화를 들려준다. 하룻밤 재워 줬더니 부부가 외출에서 돌아오니 아이들 목욕을 싹 다 시켜 놨다고. 가수 김수철은 누나 동생 하는 사이의 오랜 인연을 맺고 있단다. 어떤 분야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 통하면 친구가 되고 그 끈은 오래오래 변함없이 이어진다고 더듬는다. 피천득 작가의 아드님인 피수영 박사는 ‘처음과 지금, 무대 위와 아래가 똑같은 사람’이라면서 신생아를 전공한 의사로서 또 오랜 친구인 윤 여정 배우의 매력을 자랑한다.

‘겉·까·속·따’. 겉은 까칠해 보여도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던가. 한번 맺은 귀한 인연은 소중하게 여겨지면 길고도 길게 이어가는 그녀 자신은 결코 미인이 아니란다. 독특한 개성의 얼굴이라고 인정하니 자신이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역으로 작품을 재해석해 더 좋은 역할을 해내지 않았으랴. 작품을 받으면 적어도 일백 번을 읽는다던 이. 자기만의 개성과 올바른 판단으로 맺고 끊음은 확실히 하는 꼿꼿한 인생 선배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언제나 아침에 눈 뜨면, 기도를 하게 돼, 달아날까 두려운 행복 앞에…’ 서영은의 노래 ‘아름다운 구속’의 가사가 입가에 맴도는 오월, 아름다운 날이다. 늘 희망 가득한 새로운 마음으로 또 새로운 계획을 꿈꿔보면서 오늘 하루도 더 많이 행복하시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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