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상주 검간 조정 문집목판

발행일 2021-04-18 19: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검간 조정(1555∼1636) 선생은 세 차례에 걸쳐, 임금의 몽진을 만류하고 친정(親征)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린다. 목숨을 건 일이었다. 친정소의 부분들을 옮긴다.

“전하께서 만일 온 나라 사람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후퇴하는 것으로써 양책(良策)을 삼는다면 종사도 그만이요 국가도 그만이니, 신등(臣等)은 오직 고향 사람과 함께 발을 싸매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나무를 안고 죽어, 살아서는 적의 손에 더럽히지 않고, 죽어서는 충의(忠義)의 귀신이 되는 것이 기원이오니, 또 어찌 다른 것을 계교하겠나이까. ”-1596년 친정소(親征疏) 부분

“설령 불행하여 패전한다 하더라도 군신 상하가 한 마음으로 싸워 종사를 지키는 데에 욕됨이 없으면, 그것이 도성을 버리고 백성을 등지며 변방에서 구차히 보전하는 것보다는 만 배나 나을 것이옵니다.” -1597년 친정재소(親征再疏) 부분

“전하께서 스스로 분발하지 못하고 구차히 편안할 것을 취한다고 논한다면 이는 부당한 일이요, 전하께서 후뢰(後賴)하는 데만 급급하고 복수에는 범연(泛然)하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또한 불가한 일이니, 전하의 마음속에 있는 바를 추측할 수 없사옵니다.” -1597년 친정삼소(親征三疏) 부분

1592년 4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선발대가 침략한다. 부산성이 무너지고 동래성이 함락된다.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한 왜군은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도순변사 신립의 정예 병력마저 궤멸시킨다. 선조는 허겁지겁 피란길에 오른다. 한양이 함락되자 평양으로 달아났던 것. 민심이 흉흉해지자 임금은 파천을 건의했다는 이유로 영의정 이산해를 파직시키고, 두 왕자를 황해도와 강원도로 보내 근왕병을 모집한다. 그러나 허사였다. 분노한 백성은 도리어 두 왕자를 사로잡아 왜군에게 넘긴다. 민란이 일어나 노비 문서와 형조 건물이 불타고 궁궐이 약탈당하기에 이른다. 왜침 보름 만에 전 국토가 짓밟히고 선조는 압록강 변 의주까지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은 무섭다. 선한 민심은 배를 띄우고 성난 민심은 배를 뒤집는다.

400여 년 전의 이야기가 왜 우리가 사는 작금의 처지와 겹쳐지는 것일까? 국난을 맞아 도망치는 임금과 ‘구차히 편안할 것을 취하는 전하의 마음속을 헤아릴 수 없다’는 한 선비의 비분강개가 왜 지금 이 땅의 집단무의식과 겹쳐지는 것일까? “군신 상하가 한 마음으로 싸워 종사를 지키는 데에 욕됨이 없는”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타는 목마름 때문일 것이다. ‘몽진’이란 말 속에 어른거리는 치욕과 비굴, 무책임과 사리사욕, 먼지를 머리에 뒤집어 가진 자의 꼴불견은 현상만 다를 뿐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임금(임금이란 말을 권력, 재력, 정보력 등 ‘힘을 가진 자’로 확대해 보라.)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몽진(蒙塵)이란 말은 머리에 먼지를 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몽진의 행태 속에는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쓰는 치욕과 비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쓰고서라도 나만 살고 보겠다는 무책임과 사리사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임금의 몽진, 그 부당함을 엎드려 고하던 검간 선생이 그리운 이유이다.

◆선한 민심 배 띄우고 성난 민심 배 뒤집어

조정 선생의 본관은 풍양, 검간(黔澗)은 선생의 호이다. 1599년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를 거쳐 1605년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했고, 벼슬이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르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에 봉향되었다. 이광정은 “그의 충성심은 임금님의 과오를 능히 간할 수 있었으며 강직한 성품은 문란한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었다”고 했고, 소암 임숙영은 당대 ‘정검간선생시(呈黔澗先生詩)’에서 “십년을 엄체하여 뛰어난 재능을 굽혔으나/ 오직 강직한 기질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네./ 미관(微官)으로 강호에서 헛되이 늙는데도/ 동량재를 알아 애석해 하는 이는 없네.” 와 같이 선생의 인품을 기리고 있다. 선생은 국가적 동량재로서의 큰 그릇이었으나 시운을 잘못 만나 크게 등용되지는 못했지만 당대의 석학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선비였고,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두 아들을 화왕산 망우당 진영에 보내 나라를 지키려 한 우국충정의 의병장이기도 했다.

상주 양진당 검간 조정 문집목판(2018년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656호로 지정)은 선생의 삶과 정신을 집대성한 것이다. 선생의 5세손인 학경, 관경 형제가 유문을 모아 1740년(영조 16)에 이광정의 교정을 받아 간행했다. 권1에는 시(詩), 부(賦), 권2에는 소(疎), 전(箋), 상(狀), 서(書), 권3에는 잡저(雜著), 논(論), 제문(祭文), 권4에는 연보와 부록이 수록되었고, 진사일록(辰巳日錄)이 덧붙여져 있다.

총 7책의 조정 검간 선생의 일기 중 진사일록은 임진왜란 당시 임진년과 계사년의 기록으로 상주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행적을 적고 있다. “임금께서 몽진하신지 이미 5개월이 지났다. 각 고을의 수령과 군의 장수들은 숨어버리고 나라 위해 힘쓸 자가 없다. 이제 임금께서 책망하시고 도움을 구하시니 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앞장서서 적을 토멸시키겠다는 군대가 곳곳에서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는데 다만 우리 상주, 함창, 문경만이 단 한 사람도 없음을 통분하게 여겼다. 이제 뜻을 같이 하는 동지와 더불어 약장을 만들고 왕사(王事)를 위해 같이 죽기를 맹세하였다. 그러나 그 꾀한 바가 요로에 복병을 심어 잔적을 토벌하는데 불과하여 극가 성패에 큰 영향은 없을 것이나 형세가 부족하더라도 우선 할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애국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임진년(1592) 음력 7월30일 일기의 한 대목이다.

선생의 애국충정이 눈물겹다. 난중에 쓴 선생의 일기는 왜란 발발과 급박한 변방의 사태, 날로 다급해지는 격문의 발표내용, 우리 군의 거듭된 패전, 피난생활의 참혹한 상황, 왜적의 북상소식, 패망병졸들의 남루와 유혈이 낭자한 처참한 모습, 왜적의 약탈, 백성들의 두 팔을 자르는 등의 만행과 부녀자들의 겁탈, 관청, 객사 등을 소각하고, 소, 닭, 개 등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왜적의 잔인한 만행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보물 제1003호)이다.

◆고을 수령과 군 장수들은 숨어버리고 나라 위해 힘쓸 자 없다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에 있는 양진당(보물 제1568호)을 찾았다. 양진당(養眞堂)은 검간 조정 선생이 1626년 처가인 안동에 있던 가옥을 옮겨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정면 9칸, 측면 7칸의 규모의 ‘ㅁ’자형 평면을 한, 땅의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땅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고상식 건물이다. 퇴칸 전면에 세운 6개 기둥은 통나무를 사용하였는데, 특이하게 하층부분에는 방형으로 손질하고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었다. 지붕은 몸채의 툇마루 상부만 겹처마로 하고 나머지는 홑처마로 하였는데, 겹처마의 경우 일반적으로 원형 서까래에 방형 부연을 얹는데 비해 양진당은 서까래를 네모지게 다듬어 부연과 같은 모습을 취하게 했다. 본채의 3칸 온돌방 전면과 3칸 대청 배면의 창호는 모두 중간설주가 있는 영쌍창이다. 이 건물은 고상식 주거에서는 보기 드문 구들을 설치한 점에서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꼽힌다. 방이 두 줄로 나열되는 겹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기둥은 굵은 부재를 사용하면서도 모서리를 접어서 투박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적 성숙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서 목조 수법 등 조선 중기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검수완박’, ‘부패완판’과 같은 장군, 멍군식 신조어들이 격문처럼 나뒹구는 나날의 끝은 어디일까? 1636년 82세의 나이로 검간 선생이 눈을 감은 양진당 뜰을 거니노라니, 법과 상식과 정의를 내팽개치고 제 살 구멍을 파는 자들의 후안무치, 힘센 쥐새끼들이 신도시개발지역으로 사리사욕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우루루 떼 지어 몰려다니는 현대판 몽진의 상한 풍속도가 어른거렸다.

“지금 적병이 벌써 변경에 상륙하여 죽을 날이 임박하였으므로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을 올려 나라에 보답하겠사옵니다. 아, 친정(親征) 두 자는 오늘날의 급선무로서 만구일담(萬口一談)으로 당연하다 하온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어렵게 여겨 소장(疏章)이 앞뒤의 연달았으나 아직도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니 신등은 그윽히 의혹하옵니다.”

400여 년 전 검간 선생의 상소문, 그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보건데, 오늘, 여기 아름다운 내 나라 변경에 상륙한 법과 정의와 상식의 ‘적병’은 누구인가? “오늘날의 급선무로서 만구일담으로 당연한” ‘친정’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윽히 의혹할 따름이다.

강현국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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