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예꺼정, 예꺼정 왔네. 발품 하냥 팔고 왔네.//이승 굽이 머흔 굽잇길 발품, 발품 팔고 왔네.//들기름, 참기름 먹인 듯 훗승 길도 얼비치게.장편 서사시조집 「만적, 일어서다」(동학사, 2021)윤금초 시인은 전남 해남 출생으로 1966년 공보부 신인예술상 시조부문 입상과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어초문답’, ‘땅끝’, ‘무슨 말 꿍쳐두었니?’, ‘질라래비 훨훨’, ‘앉은뱅이꽃 한나절’과 장편 서사시조집 ‘만적, 일어서다’ 외 다수가 있다. 특히 근간에 상재한 ‘만적, 일어서다’는 시조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오랜 열망의 소산이다. 이 작품집에는 시조의 형식 실험을 모색하는 일에 적공을 들여서 단시조는 물론이고 연시조·양장시조·엇시조·사설시조를 두루 천착한 결과물이 도처에서 새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암중모색은 현대시조의 내용과 형식의 확장에 적잖이 기여할 것이다. 후기 끝부분에서 비록 남같이 발씨 재바르고 이악스럽지 못한 성미도 성미지만, 굼뜨고 더딘 품새로 싸목싸목 담금질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소회를 말하고 있다. 호흡이 유장하고 다양한 수사법을 구사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김학성은 작품 해설 ‘만적의 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풀다’에서 장편 서사시조의 새 지평을 연 점을 거론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친 연작의 완성 과정과 혼신을 다하는 형식 실험의 적공이 낳은 성과물로 봤다. 즉 정격시조의 진지함과 사설시조의 놀이성에 무가의 역동성까지 더하는 옴니버스시조라는 전인미답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현대시조의 우뚝한 거봉으로 우리 시대에 자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장편 서사시조집 ‘만적, 일어서다’에 수록된 단시조 ‘어느 무요일’을 살펴본다. 시의 화자는 내 예꺼정, 예꺼정 왔네, 발품 하냥 팔고 왔네, 라고 예꺼정의 되풀이로 리듬을 일으키며 그동안 살아온 길이 순탄치 않았음을 은연중 상기시키고 있다. 누구인들 그렇지 않으랴. 인생살이 육칠십 년이면 온갖 풍상을 겪는 신산의 세월을 두루 헤쳐 왔을 터다. 그래서 부지런히 발품을 판 것이다. 그래서 중장에서 또 다시 이승 굽이 머흔 굽잇길 발품, 발품 팔고 왔네, 라고 두 차례 더 발품이 등장해 열심을 다한 발품에 대해 무한 감사의 정을 가감 없이 표출하고 있다. 그 발품은 이승의 일로 그치지 않는다. 종장 들기름, 참기름 먹인 듯 훗승 길도 얼비치게, 라는 결구가 그 점을 명약관화하게 이미지화한다. 시의 화자가 가 닿아야할 훗승 길이 들기름과 참기름을 먹인 듯 반지르르 닦이기 위한 밑거름이 곧 발품인 것이다. ‘어느 무요일’은 시조의 본령이라고 일컫는 단시조의 개성적인 전개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예꺼정과 발품의 되풀이를 통해 시조 고유의 흥청거리는 리듬을 생성해 읽는 맛을 돋울 뿐만 아니라 의미를 심화시킨다. 삶의 지난한 과정을 미학적으로 포용한 넉넉한 세계는 이렇듯 질펀하고 흥겨운 노래가 돼 어둑한 시야에 빛 한 줌을 뿌린다.그는 또 다른 단시조 ‘낮달 야사’에서 허천나게 배고파서, 배고파서 삘기 씹던 가풀막 황토 언덕 가도 가도 허기졌던 때를 회상하면서 흰 낮달이 뒷등 여수고 낫을 벼리고 있었던 정경을 떠올리고 있다. 삘기를 씹으며 황토 언덕길을 걷던 날 낮달마저도 화자의 뒷등을 엿보며 낫을 벼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종장의 이미지를 어떻게 음미해야 옳을까? 아마 화자가 그 느낌을 받는 순간 전율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 중에 극심한 허기를 이겨내는 힘을 얻지 않았을까.‘어느 무요일’처럼 ‘낮달 야사’ 또한 이렇듯 의미심장하다.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