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직전 청도군 치소 방어시설로 축성||일제 강점기 읍성 철거 정책으로 크게 훼손||1995년 경북도 문화재 기념물로 지정…조사와 복원 디딤돌 놓아||
읍성(邑城)이란 무엇일까? 읍성은 한 고을의 수령이 주재하는 치소인 읍치를 둘러 쌓은 성곽을 말한다. 주로 두 가지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성곽 본연의 것으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거점으로서의 기능이었다. 읍성은 전쟁과 같은 유사 시에는 일차적으로 성안에 설치된 각종 관청 시설과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읍치 주변의 백성들까지 성내로 입보(入保)하여 외적에 맞서 싸우는 방어 진지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왕을 대리하여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과 그가 집무하는 관아가 있는 행정 중심지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능이었다. 높다란 성곽이 둘러쳐진 읍성의 존재는 보는 것만으로도 피지배 백성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고 지배자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시설물이었다.이러한 읍성은 우리 역사 속에서 청동기·철기시대의 자연발생적인 방어취락과 초기국가 형성기의 정치·군사 중심지에 거의 예외없이 축조되었던 토성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시대와 대내외적인 조건의 변동에 따라 그 입지(立地)와 위치는 변화를 거듭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읍성들이 널리 축조된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문헌에 의하면 남부지방으로 한정하더라도 ‘세종실록’지리지에 69개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 104개소에 읍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시설물이었다. 다만 현존하는 읍성은 처음 축조된 후 훼손과 증개축 등 많은 변모 끝에 겨우 남아 있는 이른바 ‘잔존 유적’이 대부분이다. ◆청도읍성의 역사청도는 초기 소국인 이서국(伊西國)의 고지로서, 이서국의 중심 성곽은 화양읍 토평리 백곡마을에 남아있는 백곡산성(栢谷山城)이었다. 이 성은 이서국이 신라에 복속된 후에도 얼마동안 치소성으로 활용되다가 청도지역이 밀성군(현 밀양시)에 속하게 되면서 기능을 잃고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고성(古城)으로 변하고 말았다. 고려말 1366년(공민왕 15)에 이르러 청도는 밀양에서 떨어져 나와 비로소 독립 행정구역인 청도군으로 승격되었다. 승격과 더불어 현재의 화양읍내에 군치소가 설치되었다. 옛날의 치소성과 달리 새로 설치된 치소는 평지에 입지했던 만큼 방어에 매우 취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치 당시에 치소를 둘러싸는 성곽은 축조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외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에는 치소에서 동쪽으로 7리 떨어진, 규모는 작지만 주구산(走狗山)의 험준한 절벽을 이용해 쌓은 폐성(吠城; 走狗山城·伊西山城)을 대피성으로 활용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폐성을 청도의 ‘읍성’이 아니라 ‘읍산성(邑山城)’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청도군 치소의 방어시설로서 청도읍성이 축성되었던 것은 임진왜란 직전이었다. 왜군의 침략을 예견했던 조선 조정은 1590년(선조 23)부터 영남과 호남의 주요 성읍에 성곽을 수리·증축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환으로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주요 간선도로인 영남대로(嶺南大路)가 지나는 길목에 있는 청도에도 읍성을 쌓기 시작했다. 당시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의 총지휘 아래 군수 김은휘(金殷輝)가 축성공사를 시행하였다. 이 최초의 청도읍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인 1591년에야 완공되었다.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청도읍성은 비록 석성(石城)이었지만 매우 급하게 축조한 탓에 크지 않은 규모의 허술한 성곽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식자(識者)들은 이미 이 성이 제대로 방어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 1번대는 약 1만9천의 병력으로 영남대로를 따라 거침없이 북상하였다. 7일 후인 4월 20일에는 청도에 이르러 읍성을 손쉽게 함락시키고 성내의 관아시설과 동·북·서문 위의 누각을 불태우고 성벽까지 일부 파훼(破毁)하였다. 그 때 방어책임자인 청도군수는 대구와 인접한 최정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있었다고 한다. 임란 이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청도읍성도 몇 차례 보수와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1669년(현종 10)에 군수 유비(兪秘)가 3문을 수리하고 서문루인 무회루(撫懷樓), 북문루인 공북루(拱北樓)를 새로 건축하였으며, 1708년(숙종 34)에는 동문루인 봉일루(捧日樓)가 세워졌고 1798년(정조 22)에 봉일루는 다시 중건되었다. 3문으로 유지되던 청도읍성은 1870년(고종 7)에 남문을 새로 내면서 문루로 진남루(鎭南樓)가 세워져 방형의 성곽에 4문과 문루를 갖춘 전형적인 읍성 형태로 변형되었다.4개 성문을 가진 석축 성벽으로 둘러쌓여 성내에 많은 관아 건물과 민가가 어울려 있던 청도읍성은 일제의 강압적인 읍성 철거 정책에 의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성내에 동서 도로를 넓혀 개설하면서 4문의 성문과 성벽이 부분적으로 철거되었고, 관아 건물로도 객사였던 도주관(道州館)과 군수가 집무하던 동헌 즉 주홀헌(柱笏軒) 정도만 남고 나머지 대부분은 훼철되었다. 성벽 또한 무너진 채로 방치되다가 주민들에 의해 전답으로 개척되는 중에 민가의 담장이나 심지어 밭둑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겨우 흔적만 남은 쓸쓸한 폐고성(廢古城)에 다름 아니었다.이런 변형과 훼손에도 불구하고 청도읍성은 1995년에 경상북도 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비록 동쪽 성벽 일부 구간으로 지정 범위가 한정되었지만, 이후의 청도읍성에 대한 과학적 조사와 복원으로 향해 가는 디딤돌을 놓았던 큰 의미를 가진 조치였다. ◆청도읍성의 구조적 특징과 조사청도읍성의 구조는 조선 후기에 그려진 각종 읍지류의 그림지도와 ‘성지(城池)’나 ‘관기(官基)’ 항목의 서술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청도읍성이 자리잡은 현재의 화양읍은 남고북저형의 지세로서 남쪽 가까운 곳에 진산인 오산(鰲山; 높이 550m)이 포함된 산괴(山塊)가 가로막고 있어 남쪽으로는 도로가 통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그래서 치소를 감싸는 방형의 성곽을 지으면서 남문은 없고 동·북·서문만 있는 다소 독특한 형태의 읍성을 쌓게 되었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대략 둘레가 1천570보(약 1.9㎞), 높이가 5.5척(약 1.7m 혹은 2.5m)였다.성벽은 안쪽과 바깥쪽에 돌을 쌓아 올리고 가운데를 토석(土石)을 채워 다지는 내외협축(內外挾築)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외성벽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는 시설인 여첩(女堞)을 600여 곳에 설치하였고, 성문 앞에는 성문을 보호하고 적의 직진을 막기 위한 옹성(甕城)을 쌓았으며 성문의 좌우에는 성벽을 네모 형태로 바깥으로 돌출시켜 적이 성벽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적대(敵臺) 혹은 치성(雉城)을 만들었다.성 안에는 당연하지만 여러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여지도서’에 실린 청도읍성 그림지도에 따르면 성내의 관아 건물로 객사(客舍), 아사(衙舍), 주홀헌(主笏軒), 제금당(製錦堂), 창고, 향청(鄕廳) 등이 대부분 성의 남쪽 지역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북쪽 성벽 서단부 저지대에는 각종 읍지에서 성내지(城內池)라고 하는 못 하나가 있었다. 이러한 청도읍성의 경관은 일제강점기에 철저하게 훼손되었다. 대부분의 관아 건물이 사라졌고, 성벽과 성문도 파괴되었다.2003년과 2005년에 정밀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를 기본 자료로 삼아 2006년부터 2018년까지 총 9회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사방의 성문과 주변 성벽에 대한 발굴 조사였다. 그 결과 성의 구조적인 특징인 성벽 체성(體城), 성문 앞의 옹성, 성벽을 바깥으로 꺾어 내어 쌓은 치성 등이 확인되었다. 또 성벽의 축조를 위한 기초 부분의 조성 방식도 밝혀졌다. 요철이 있는 지형을 평탄하게 다듬은 후 20~30㎝ 두께로 지표를 덮었으며, 그 위에 막돌과 흙을 다져 3단을 만들어 기초부를 조성하였다. 그 폭은 대략 610∼1천20㎝로서 그 위에 쌓은 체성의 폭보다 2~3배 넓었다. 내외협축으로 축조한 체성은 그 폭이 대략 320~540㎝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성벽의 견고성을 뒷받침하는 보조 시설도 찾아냈다. 외벽 바깥에는 기초부로부터 230∼250㎝까지 점토와 토석혼축으로 다짐한 3단의 보축을 만들었고, 내벽에도 토석혼축의 내탁부를 설치했다. 이들 성벽 보축시설은 경사가 매우 짧으면서 완만한 정교한 축조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확인된 귀중한 정보는 그 후 청도읍성을 복원하는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복원된 청도읍성 성벽을 거닐다.청도읍성은 2008년부터 2022년까지 뜨문뜨문 복원정비 사업이 진행되어 왔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동문과 좌우의 동쪽 성벽, 북문과 문루인 공북루 및 좌우의 성벽 및 치성 2곳, 서문과 무회루 및 인접 성벽, 그리고 북문과 서문 앞의 옹성 등이 복원되어 점차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청도군에서는 이를 계기로 청도읍성을 국가문화재인 사적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청도읍성은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많은 관람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고, 또 식상하다고 느낄만큼 여러 언론에서 자주 소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급이 피상적인 관찰을 묘사한 것이어서, 이 글에서는 의도적으로 읍성의 역사와 발굴조사 내용 등 학술적인 부분을 조금 길게 서술하였다. 겨울이지만 필자도 포근한 날을 골라 청도읍성 성벽 위를 거닐어 보았다. 복원된 읍성 규모나 사용된 성돌이 다소 과장되고 너무 세련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문화유산의 적극적인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타박만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면의 부족으로 반드시 소개해야 할 문화재가 누락된 것도 있다. 관아 시설인 도주관(경북 유형문화재)과 주홀헌(경북 문화재자료)의 건축적 가치나 역사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숨어 있지만 부득이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읍성 동남쪽 근거리에 위치한 청도 석빙고(보물)와 더불어 한번 탐방해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문화유산이다.이문기(경북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