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행정고시·사법고시·외무고시 등 고시에 해당하는 제도가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고려 때 처음 도입된 과거 시험이 바로 그것이다.혀를 내두를만한 난이도의 고시에 합격한다면 그 뿌듯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특히 정부로부터 받은 임명장은 고이 모셔두고 간직할만하다.마찬가지로 고려 때도 ‘홍패’라 불리는 과거시험 급제 첩지(임명장)가 있었는데 삼 껍질 또는 삼베로 만든 종이인 마지에 임용에 대한 내용이 적혀 하사됐다.마지는 A4용지와 같은 종이나 한지와 달리 습도·온도 등 보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가운데 긴 세월과 전란을 이겨내고 현재까지 내려오는 홍패가 있다.바로 ‘장양수 홍패’가 그것이다.800여 년의 시간을 간직한 장양수 홍패, 그리고 장씨의 후손이 선대를 추존하고 후대를 양성하기 위해 지은 월계서원에 담긴 이야기는 흥미롭기 그지없다.◆장양수 홍패, 한국문서사에 한 획을 긋다추밀원 부사, 전리판서 등을 역임한 장양수는 울진부원군 장말익의 7세손이다. 더 올라가면 신라 남북국시대 한반도의 해상을 제패했던 장보고 또한 울진 장씨의 선조라고 전해진다.장양수 홍패는 고려 조정이 희종 원년(서기 1205년) 과거에 합격한 장양수에게 내린 교지다.현존하는 패지 중 가장 오래된 문서로 고려 과거제도를 연구하는 데 아주 귀중한 자료기도 해 1975년 국보 제181호로 지정돼 국보각에 보존돼있다.보존 환경에 예민한 문서기에 일정 온도·습도를 유지하는 보존함에 원본이 보관돼있고, 문화재청이 원본을 그대로 본뜬 사본이 비치돼있다.일제강점기 전 한자를 쓰고 읽던 방식에 따라 오른쪽부터 쓰였는데, 가장 첫 줄에는 장양수의 급제 등수인 크게 ‘교가병과’가 쓰여있다.이어 급제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첩지라는 뜻을 가진 ‘급제첩지준’이란 한자에서 지금 쓰이는 한자와는 다른 속어 등이 발견돼 고문헌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안타깝게도 가장 첫 줄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다소 훼손돼 일부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천만다행으로 가장 중요한 급제자의 이름 부분인 ‘장양수’는 훼손되지 않았다.이어 ○○공원(貢院)○○○ 부분은 고문서 연구 학자들의 숙제로 남았다.왼쪽에는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고려 무인정권의 재상들 이름과 서명이 차례로 나온다.왕규·임유·최충헌·기홍수·최선.국사책에서 익히 본 최충헌의 관직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이부상서·상주국·상장군·판병부어사대사로 당대 얼마나 많은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 홍패는 800여 년 전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장씨 대종회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나라에 혼란이 있을 때마다 장씨들이 나서 역사를 품은 홍패를 지켜왔다.장씨 대종회 관계자는 장양수 홍패의 국보 지정 전 한때 불이 났을 때 할아버지가 무엇보다도 족보와 홍패를 가장 먼저 품에 안고 나왔다고 전한다.고려대·조선대의 과거 합격증은 색깔에 따라 홍패·백패·황패로 나뉜다.홍패는 문과·무과인 대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던 합격증서다.고려에는 지방에서 문과 시험에 뽑힌 사람들이 국자감에 다시 모여 치르는 시험인 회시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는 증서로 붉은 종이에 적어 ‘홍패’라 불렸다.색깔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바랜 것인지, 당시 염색 기술의 한계 때문인지 실제 맨눈으로 보면 갈색에 더 가깝다.백패는 소과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에게 주던 증서며 흰 종이에 관명·과별·이름·성적 등을 썼다.황패는 고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성적의 등급과 성명을 노란 종이에 기록해 주던 합격증이다.과거 합격증 중 가장 높은 급에 차지하는 홍패는 그만큼 희소성이 있다.‘국자감시 시원은 3품 이하의 관원으로 한다’는 일반 홍패의 규정과 달리 문서 뒤에 나열된 5명의 재상은 정2품 이상이어서 장양수 홍패는 차원이 다르다.◆국보를 품은 월계서원서원은 선비들이 학문을 강론하고 석학 또는 충절로 죽은 이를 제사 지내는 곳이다.서원은 한적하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있어 학문과 수양에 적합한 환경을 갖고 있다.한양에 위치한 관학에 비해 까다로운 학령의 규제를 덜 받고 비교적 자유로운 중등 사학 교육기관이라 볼 수 있다.중앙의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가 공자 이래 역대 유학의 성현들을 모두 제향하는 데 비해 서원은 한두 사람의 이름난 성현에 대해 제향을 했다.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쇠퇴하면서 서원이 대신해서 지방의 문화와 교육을 진흥시키는 데 기여한 바 크다고 할 수 있다.월계서원도 양지바르고 울진 고을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다.조선 25대 철종 7년(서기 1856년)에 후손 월호공 지연과 향유림들의 장계에 의해 무월동에 월계사를 창건했다.그 후 세덕사, 경덕사로 개칭되면서 현재 고성리로 옮겨 세워져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사교육기관의 구실을 충실히 해왔다.월계서원은 관조 장말익 선생과 전리판서 장양수 선생 양위를 모신 경덕사, 관조 문성공의 제단, 동재, 서재, 강당, 국보각, 신도비, 재사 등을 총칭한다.경덕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서원과 서당이 번성했는데 유현 문성공 장말익 선생과 유현 전리판서공 장양수 선생의 위패를 간직하고 있다.장씨의 후손들은 매월 음력 1일(삭 분향)과 15일(망 분향) 두 차례 분향하는데 월계서원 훈장의 유생 중 하나인 향 유사가 올린다.춘향례와 추향례는 울진 유림의 큰 행사라 할 수 있다.삼짇날(음력 3월3일)과 음력 10월 12간지 중 두 번째 정일인 중정일(양력으로 다음달 10일)에는 장씨뿐 아니라 월계강당에서 유학한 모든 제자가 모여 제를 지낸다.제자들과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그 후손들은 300~400명으로 춘향례와 추향례가 진행될 때면 월계서원의 정문 앞까지 사람이 가득 차게 된다.유생들이 학문을 갈고닦는 공간인 강당의 기둥에는 유림 정신이 새겨져 있다.‘제월광풍갱별전’, 도량이 넓고 시원함이 다시 전하도다.‘청운백석요동취’, 높은 벼슬과 청렴함은 같이 이어진다.‘하서은상원준선왕지교’, 하나라 은나라 학교에서 말함은 선대왕의 교시다.‘춘례동시내술제자지직’, 춘하추동 연중 시·서·예 삼경을 익힘은 문도의 할 일이다.‘송조개희지세시준보첩’, 송나라(북송) 개희 원년에 첩지를 받다.‘한사승사지향잉수채지’, 한나라 사신이 뗏목을 타고 감으로 인해 택지를 받았다.기둥에 걸린 팻말에는 예서체를 닮은 듯한 예스러운 글자체에서 유생들의 호연지기가 그대로 드러난다.강당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에는 학생들의 뜻을 담은 중건기가 걸려 있다.국한문 혼용으로 쓰인 중건기에는 ‘국가에는 역대 임금님들의 흥망성쇠와 나라를 다스린 득실의 사기가 등재되고 족보에는 종족의 계보 소목과 조상의 위대한 업적이나 덕을 높인 것이 수록된다. 옛날부터 선조들의 문화와 남기신 덕을 공경해 우러러 보며 보존하는 것은 자손 된 사람의 절대적인 의무인 것이다. ... 본 서원을 창건한 이래 중간에 다시 일으킨 큰일이라 할 수 있으니 곧 훗날에 생각하게 하기 위해 두어 줄의 거친 말을 기록하는 바이다’고 선조를 충실히 섬기는 선비의 덕목과 성현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있다.가을의 정서와 옛 교훈을 함께 담은 월계서원을 걸으며 장씨 선조의 기상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유현제 기자 hjyu@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