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42대 흥덕왕의 능은 경주 안강읍 변두리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화표석과 석인상, 돌사자, 난간석과 십이지신상 등 신라왕릉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구조로 조성되어 있다. 신라 42대 흥덕왕은 헌덕왕의 동생이자 원성왕의 손자이다. 이름은 수종이었다. 형 언승을 도와 조카 애장왕 형제를 칼로 베고, 헌덕왕의 즉위를 돕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형과 함께 죽였던 애장왕의 동생 장화 부인을 왕비로 삼았으며, 부인을 끔찍이도 사랑하여 나중에 부인과 합장하라고 유언해 능은 경주 안강 지역에 합장분으로 남아 있다. 흥덕왕은 826년부터 10년 간 재위하는 동안 장보고에게 청해진을 설치해 신라의 해상을 지키며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살피면서 무역도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게 했다. 흥덕왕은 결국 아들이 없이 죽어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에 이어지는 혈육 간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이 벌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흥덕왕릉의 호석과 석인상. ◆흥덕왕흥덕왕의 이름은 수종이다. 헌덕왕의 동생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아들 혜충태자 인겸이다. 어머니는 성목 태후 김씨이다. 비는 형과 함께 죽인 애장왕의 동생 장화 부인이다. 흥덕왕은 헌덕왕 11년에 상대등으로 임명되었고, 3년 뒤인 822년 다음 왕위를 이을 부군으로 명받아 동궁으로 들어가 왕위를 계승할 준비를 했다. 수종은 아버지가 태자 신분이던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궁궐에서 다양한 업무를 맡아 왕실의 수업을 착실히 쌓았다. 당시 동생 충공과 함께 둘째 형이었던 언승의 핵심적인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 수족같이 움직였다. 수종은 조카 애장왕의 변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형 언승과 함께 반란을 준비했다. 수종은 “애장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우리 형제들을 숙청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가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우리는 물론 가족들과 우군들의 생명을 담보할 수도 없다”면서 “미리 군사들을 모아 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왕을 제거하는 반란에 가담해 형제들과 함께 직접 왕의 목을 베고 형 언승을 왕으로 추대했다. 평소에는 차분하던 수종은 성격이 괄괄해 급하게 설치던 형 언승과는 다르게 큰일을 앞에 두고는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실천에서는 오히려 형보다 과감하게 밀어붙였다.흥덕왕릉 입구의 소나무 숲.애장왕을 제거할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형 언승과 함께 변복한 심복병사들을 대동하고 왕의 처소로 직접 처들어갈 때도 수종이 앞장서 저항해오는 애장왕의 동생 체명의 목을 먼저 서슴없이 베었다. 이어 수종은 동생 충공과 함께 형 언승을 헌덕왕으로 추대해 왕좌에 앉게 하고, 헌덕왕의 개혁정치를 맡아 과감하게 정치를 진행했다. 수종은 헌덕왕에 이어 826년 제42대 흥덕왕으로 즉위했다. 흥덕왕은 헌덕왕과 함께 주도했던 개혁정치를 그대로 이어받아 추진했다. 헌덕왕과 흥덕왕에 이어지는 20여 년 동안 내정은 어지러워지고 김주원 후손들의 반란과 이어지는 흉년으로 인한 도적떼들이 곳곳에 출몰하는 등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특히 왜구들의 노략질과 중국으로 이어지는 뱃길을 가로막는 해상도적들의 횡포가 심해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이때 당나라에서 돌아와 해상무역을 하던 장보고가 흥덕왕을 찾아와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장보고의 우락부락한 성품에 위협을 느낀 흥덕왕은 1만 명의 군사를 모집할 권한을 부여하고, 장보고를 해상을 지키는 군대의 수장으로 명했다. 장보고는 왕의 허락에 엎드려 감사 인사를 올리면서 흥덕왕의 요청에 따라 “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궁궐을 향해 군사를 진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이어 강력한 군대를 양성해 ‘해상왕’으로 불리며 신라의 안전한 뱃길을 열었다.흥덕왕릉을 지키는 수호신 십이지신상. 모두 소매끝과 옷자락 끝부분이 하늘로 치켜올라간 날렵한 모습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흥덕왕의 사랑흥덕왕은 자유로운 생각을 하며 행동 또한 왕족으로 예법에 얽매여 궁궐에서만 생활하는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흥덕왕은 부군으로 동궁에서 왕의 수업을 받을 때에도 가끔 변복을 하고, 시중을 돌아다니면서 일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민초가 되어 자유로운 생활을 시도했다. 수종은 자유분방한 생각과 행동처럼 사랑도 자유분방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규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는 한 여자와 밀도 높은 사랑을 나누는 평범한 사랑은 경험하지 못했다. 벌 나비가 꿀을 탐해 꽃을 옮겨 다니듯 많은 여성들과 가벼운 사랑놀이를 즐겨했다. 그래서 나이 꽉찬 부군의 위치에서도 정상적으로 배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흥덕왕릉 주변의 사자상. 네 방향에서 각자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궁궐에서 한약재를 다루는 한 여인을 보고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멈추어 서버렸다. 그날 이후로 수종은 매일 약재실을 드나들며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수종은 사랑에 빠져 아름다운 그녀에 대해 파고들다 형과 함께 죽이고 왕권을 빼앗은 조카 애장왕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그의 마음은 한약재를 매만지는 장화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수종은 형 헌덕왕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졸랐다. 그들은 왕의 목을 베고 왕권을 탈취한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왔다. 헌덕왕은 수종에게 “결국은 알게 될 것이다. 비극적인 사랑은 허락할 수 없다”면서 마음을 돌리라고 엄하게 일렀다. 수종은 결국 헌덕왕과 주변 사람들 모르게 사랑을 키워 장화 여인과 밀애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종의 사랑이 끔찍할 정도로 깊어 장화도 그만 그의 넓은 가슴에 흠뻑 젖어들어버렸다.흥덕왕릉. 장화 부인과의 합장분으로 전해지고 있다. 헌덕왕이 죽고, 흥덕왕으로 취임하게 된 수종은 곧 장화 부인과 혼례를 치르고 왕비로 맞아들였다. 형의 말이 맞았다. 시녀로 들어온 궁녀에게서 흥덕왕 형제가 난을 일으켜 왕권을 탈취한 사실을 알게 된 장화부인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장화부인은 “수종 당신을 사랑하지만 동생을 죽인 원수인줄은 차마 몰랐어요. 이제와 어쩔 수 없어 이세상에서의 인연은 여기서 정리합니다. 내세에서 나머지 사랑을 이어가길 소망합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흥덕왕은 장화 부인의 죽음을 보며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흥덕왕은 장화 부인이 자신을 자신만큼이나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욱 슬펐고, 그래서 더욱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흥덕왕은 왕비의 죽음 이후 여인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과 신하들의 끊임없는 독촉에 후궁을 들였지만 후궁 누구도 왕의 마음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흥덕왕은 일을 하면서도 항상 그녀를 생각했다. 그는 신라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장보고를 대사로 임명했다. 흥덕왕은 또 차 종자를 지리산에 심게 하고, 골품제도를 강화하면서 사치풍조를 금지했다. 그는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개편했다. 그는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하고 후손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흥덕왕은 죽음에 이르러 “나의 시신은 장화 부인의 무덤에 합장하라”는 유지를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흥덕왕릉을 지키고 있는 석인상. ◆흥덕왕의 모험흥덕왕은 형인 헌덕왕과 함께 조카 애장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다. 형이 죽고 이어 흥덕왕으로 즉위해 형과 함께 추진했던 개혁정치에 더욱 힘을 실었다. 장보고를 대사로 임명해 청해진을 설치했다. 신라의 뱃길을 안전하게 만들어 해상무역의 중심국으로 자리잡았다. 흥덕왕은 또 차 종자를 지리산에 심고, 사치풍조를 금하고,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증하면서 신라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평범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모험을 좋아하는 왕이었다. 바다와 하늘을 넘어 늘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싶어 했으며 미지의 문화와 문명에 대해 목말라 했다. 그래서 비밀리에 왕궁을 빠져나와 해적의 복장을 하고 떠돌다 민도라는 이름으로 장보고의 친구가 되었다. 장보고는 민도가 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민도를 그저 화통한 해적으로 생각하고 그와 함께 바다를 누비며 다양한 섬들을 방문하며 무역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민도는 항해를 하면서 많은 섬을 방문하고 여러 가지 모험을 했다. 화산에서 용암을 피하고, 얼음에서 빙하를 타고 내려왔다. 동굴에서 보물을 찾고, 신비의 고대유적에서 비밀을 풀어내기도 했다.흥덕왕의 업적을 기린 거북 모양의 비. 지금까지 발견된 귀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다른 문화와 언어를 체험하면서 새로운 음식과 음료를 맛보기도 했다. 이상한 동물과 식물을 만나고 스스로 이름을 붙였다. 흥덕왕은 모험에서 많은 즐거움과 감동을 느꼈다. 자신이 왕이 아니라 해적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바다의 자유와 모험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왕이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돌아가야 했다. 그는 이윽고 장보고에게 자신이 왕이라 밝히고, 그에게 감사와 사과를 했다. 장보고는 놀라고, 기뻐하고, 슬퍼했다. 장보고는 흥덕왕과 함께 더 많은 모험을 하고 싶었지만, 왕의 의무를 이해했다. 두 사람은 작별하면서 서로에게 약속을 했다. 우리는 언제든지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를 도우며, 서로를 방문하겠다고 다짐했다. 흥덕왕은 다시 왕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자신이 본 것들과 배운 것들을 백성들과 공유하려 했다. 자신이 즐거웠던 것들을 백성들도 즐길 수 있게 하려 제도를 만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