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시 산북면 운달산에 자리한 김룡사||탱화 의미 알면 탱화의 문화적 종교적 가치 다르게 보여||확연한 화풍 차이 등 문화재적 가치 높아||학술적, 재정적 후원으로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실효성 대책 마련해야||
모든 종교에는 종교화가 있다. 불교와 기독교에서는 석가와 예수의 언행을 담은 성전(聖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많다.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유일 절대신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회화 대신 모스크나 시나고그 등으로 신을 찬양했다. 서양에서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걸작이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있다. 우리나라 사찰에는 불상, 탑, 석등, 부도 같은 조각품은 많지만, 그림은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다. 원래부터 종교화가 적었던 것이 아니다. 사찰 대부분이 목조라 잦은 화재로 오래 보존될 수가 없었다. 벽화 양식의 불화는 삼국시대 초부터 많이 그렸다. 삼국사기 열전에 신라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불화로는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숭배로 사찰 문화가 급격히 퇴조했고 임진왜란으로 전국 주요 사찰이 불탈 때 대부분의 불화도 함께 소실되었다.◆불교 신앙세계 그림으로 표현한 탱화부처님의 가르침과 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탱화다. 사찰을 방문해도 탱화에 관한 설명이 없는 경우가 많아 대다수 사람은 탱화를 불상 뒷면을 장식하는 그림 정도로 이해한다. 화승들은 불교를 신봉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림으로 경전의 내용을 전달하려고 했다. 탱화는 설법하는 부처님과 직접 만나는 것과 같은 추체험을 하게 해준다. ‘그림으로 보는 불교 이야기’를 쓴 숙명여대 정병삼 교수는 “탱화의 의미를 알면 탱화의 문화적, 종교적 가치가 다르게 보인다.”라고 말한다. 탱화는 불교의 신앙체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탱화는 일반적으로 부처님을 중심으로 보살과 신중, 청법대중이 둥글게 모임을 이룬 모습으로 부처와 중생이 하나 된 세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탱화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 아미타불, 미륵불, 문수보살, 관음보살 등이 함께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을 어루만지는 약사여래불이기도, 극락정토를 만드는 아미타불이기도 하다. 극락교주인 아미타부처님 일행이 지옥 중생의 넋을 천도하는 의식을 통해 중생을 서방정토로 인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감로탱이다. 감로란 중생을 구제하는데 다시없는 가르침을 비유하는 말이다. 세상의 크나큰 이치를 깨달은 붓다는 45년 동안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설파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뭇 대중들에게 설법했지만, 그중 가장 즐겨 설법한 곳이 영취산이고, 그 성대한 자리를 그림으로 옮긴 것이 영산회상도이다.◆사불산화파 활동 유명 사찰사천왕(四天王)은 본래 인도의 고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귀신들의 왕으로 각기 수미산 중턱의 사방을 관장했다고 한다. 인도의 토속신앙이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외호신장으로 본격 등장한 것이다. 불교에 흡수된 사천왕 신앙은 중국뿐 아니라 신라시대부터 크게 성행하였다. 사천왕은 인도․중국‧한국에서 불법을 지키는 호법선신으로 크게 받들어졌으며 고대 불탑이나 건물 등에 부조하거나 상으로 조성하였다. 신라시대부터 불탑이나 승탑의 호법선신으로 부조되던 사천왕상은 고려시대의 불화와 경변상도에서 설법회의 외호신장(外護神將) 혹은 설법을 듣는 청법중(請法衆)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영산회상도, 아미타불도 같은 탱화에 외호신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사천왕도(四天王圖)가 독립적으로 제작되어 사찰의 천왕문(天王門)의 사천왕상 후면에 봉안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사천왕상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험상궂은 얼굴에 칼과 창 같은 무기를 든 채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형상이다. 조선시대의 사천왕도상은 티베트 불교의 사천왕도상을 따르고 있는데, 화려한 갑주뿐만 아니라 지물로 보탑(寶塔)과 동(幢), 비파(琵琶), 보검(寶劍), 용과 보주를 들고 있다.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운달산에 자리한 김룡사는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불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화승 집단인 사불산화파(四佛山畫派)가 활동한 사찰로 유명하다. ‘김룡사 사천왕도(四天王圖)’는 19세기 후반 사불산화파를 대표하는 수화승 하은응상(1855~1890 활동)이 설해민정, 경하도우, 수용기전 등 뛰어난 화승들을 거느리고 1880년에 제작하였다. ‘김룡사 사천왕도’는 현재 상하는 물론 좌우가 절취되어 온전한 크기는 아니지만, 대략 세로 268cm, 가로 157cm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용윤 교수와 덕성여대 이승희 교수의 ‘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는 사천왕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김룡사 사천왕도’에는 각 천왕의 존명이 적혀 있지 않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사천왕상의 지물과 배치, ‘고운사 사천왕도’에 의거해 판단하면 검을 비켜 든 천왕은 동방지국천왕, 용과 여의주를 쥔 천왕은 남방증장천왕, 탑과 당을 든 천왕은 서방광목천왕, 비파를 연주하는 천왕은 북방을 수호하는 다문천왕으로 생각된다(그림). ‘김룡사 사천왕도’는 1869년에 제작된 ‘범어사 사천왕도’에서 입상의 천왕이 지물을 들고 있는 자세와 기본적으로 같다. 그러나 탑을 들어 올리는 천왕의 역동적인 자세와 다층의 금색 탑, 짙은 음영으로 묘사된 강인한 얼굴 인상 표현, 채도가 높은 진채의 채색법과 무구, 장신구에 사용된 화려한 금박 등에서 확연한 화풍 차이가 있다. ‘김룡사 사천왕도’의 제작을 주도한 하은응상은 1862년에 ‘은해사 운부암 영산회상도’에서 의운자우를 수화승으로 모시고 불화를 제작하면서 퇴운신겸의 화풍을 습득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김룡사의 승려로서 상당히 존중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은응상이 ‘김룡사 사천왕도’의 제작을 의뢰받았을 때, 그는 의운자우를 통해 전승된 퇴운신겸의 불화 표현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김룡사 대웅전에 봉안된 1803년 작 영산회상도에 상당히 영향을 받아 그것을 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김룡사 사천왕도’는 19세기 후반 하은응상이 이끄는 화승 집단만의 표현법이 반영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천왕의 복식 문양을 화문이나 초문 대신 단청 문양에서 사용되는 소슬금, 고리금, 매화결련금, 고리줏대금 등의 다양한 금문 등으로 장식하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19세기에 이르러 지장시왕도, 현왕도, 감로도 등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한 화문석 배경을 사천왕도에도 적용하여 표현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광목천왕 화문석의 박쥐문이나 동방지국천왕과 북방다문천왕의 수복문양은 19세기 길상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확산하고 있던 것이 불교에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제작 연도와 제작자 밝혀진 불화‘김룡사 사천왕도’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조선 후기 천왕문에 봉안했던 사천왕도는 현재 그 수가 매우 적으며, 온전하게 일괄로 전해지는 예도 많지 않다. ‘김룡사 사천왕도’는 천왕문에 봉안했다는 기록과 함께 4점이 일괄로 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19세기 후반 사불산화파 수화승 하은응상이 이끄는 화승집단이 제작한 불화로 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 ‘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는 “김룡사 사천왕도는 제작 연도와 제작자가 밝혀진 불화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천왕문에 봉안되는 사천왕도의 봉안 방식과 19세기 경상북도를 대표했던 사불산화파의 화풍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자료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사료된다.”라고 했다. 사천왕도는 1994년 8월 도난당했다가 개인 박물관이 전시하려다가 2016년 도난 문화재로 밝혀져 김룡사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의 노력으로 법정 다툼 끝에 지난해 30여 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주지 상오 스님은 “김룡사 사천왕도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감회가 새롭다”며 “문화재가 된 사천왕도의 보존관리를 더 철저히 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재는 보존 관리만 하면 안 되고 일반에 공개되어 그 가치와 의미를 함께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사천왕도는 상시로 전시될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두루마리로 상자 속에 들어있다. 문화재청과 경상북도는 전시실 마련과 함께 학술적, 재정적 후원을 통해 문화재가 일반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인간의 의식·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탐욕의 바다는 그 깊이와 넓이가 어느 정도 될까. 인간이 탐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지구라는 생명 공동체는 공멸할 수밖에 없다.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집단이 치고 있는 탐욕의 울타리를 걷어내지 않으면 누구도 안전하고 행복할 수가 없다. 내 이웃이 삶의 고통으로 허덕이는 한 누구에게도 지속적인 안전과 행복한 삶은 보장되지 않는다. 소외당하는 계층이 더불어 행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지속적으로 안전하고 편안할 수 있다. 타인의 불행은 조만간 나의 행복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웃에 대한 연민과 배려, 사랑의 마음이다. 거창한 구호보다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섬세한 감성, 이웃의 작은 고통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공감 능력, 먼저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이 혼탁한 시대에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며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인 사천왕도를 바라본다. 사천왕의 부릅뜬 눈을 바라보며 옷깃을 다시 여며야 한다.윤일현(시인)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