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신문왕 시대에 활약했던 유학자이자 글씨, 조각 등의 예술에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손꼽혔으며, 신라 10현의 한 사람으로 서악서원, 경주향교 등에서 1천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존중하며 배향하고 있다. 설총은 왕의 도리를 우화 화왕계로 신무왕에게 전해 신문왕이 크게 깨닫고 정치에 참고할 뿐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본이 되게 했다. 설총은 향찰을 집대성하고, 육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백성들이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설총이 써내린 글은 엄청난 분량이지만 신문왕에게 올린 화왕계를 빼고는 전하는 것이 없어 아쉽다. 지금 학자들은 이두를 신문왕 이전에 이미 사용하던 문자라고 하지만 설총이 쓰기 편리하도록 정리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설총은 불교를 깊이 공부한 아버지 원효대사의 영향을 받았지만 오히려 유학자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설총의 탄생무열왕은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와 전쟁을 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이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의 정치를 일관성 있게 바로잡아 나갈 수 있는 정치철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때 한 대신이 시중에 떠들썩하게 떠도는 노랫말을 가지고 와 보고했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준다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련만”이라는 노래를 아이들이 골목에서 부르고 다닌다는 것이다. 무열왕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노래를 퍼뜨린 주인공을 알 것 같았다. 이미 도사의 반열에 올랐으나 시중을 떠돌며 술도 마시고 노래하며 거렁뱅이처럼 아무 곳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는 원효거사가 떠올랐다. 화랑으로 학문과 상당한 무위를 선보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승려의 길을 걸으며 많은 공부를 해 서역에서 가져온 불경도 거침없이 해석해내는 재주꾼 원효의 움직임을 무열왕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원효의 속마음을 읽은 무열왕은 원효를 요석궁으로 모셔오라고 신하들에게 엄밀하게 명했다. 원효는 백성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진리를 깨우쳤지만 이를 교육하고 전파해 깨우치게 할 방법이 막연했다. 원효는 재력과 조직력을 가진 나라의 힘을 빌리기로 마음 먹었다. 혼인한지 사흘 만에 과부가 되어 요석궁으로 돌아와 있는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는다면 나라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답을 가진 원효가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던 것이다. 무열왕과 원효의 이러한 내막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원효와 요석공주의 합방이 이루어지고, 신라 3대 문장가 설총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설총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풍모를 자랑했다. 원효의 훤칠한 신체와 빼어난 미모의 요석공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했다. 설총은 요석궁에서 자라면서 학문과 무예 모든 방면에 걸쳐 엄격한 수업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머리와 자질로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것이 없고,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문의 이치는 반드시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하는 버릇을 들였다. 무술에 대한 자질도 뛰어나 건장한 체격으로 성장했지만 설총은 무예보다는 학문과, 서예, 그림 등의 예술적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화왕계신문왕은 장인이었던 김흠돌의 반란을 제압하고, 귀족들의 세력이 득세해 나라를 운영하는데 혼란스럽고 제대로 마음먹은 대로 정책을 펼칠 수 없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신문왕이 가장 두드러지게 변화를 꽤했던 분야가 인재 등용이다. 기존의 귀족중심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6두품 출신에서 뛰어난 인물들을 가까이에 두고 국학 설치 등의 제도개혁에 나섰다. 이때 가까이에 두고 도움을 받았던 인물이 설총이다. 신문왕은 정사를 펼칠 때는 물론 잠시 산책을 하거나 차담을 나눌 때도 설총을 불러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토론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신문왕의 노력으로 신라시대 설치했던 국학도 설총의 건의로 시행된 정책이라고 해석된다. 설총이 신문왕의 요청으로 국왕의 도리에 대한 이정표가 될만한 이야기를 우화로 직접 들려드린 화왕계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화왕계는 꽃의 왕 목단이 장미와 할미꽃과 나누는 대화로 전개된다.꽃의 왕 목단이 봄을 맞아 화사하게 피어나자 모든 꽃들이 목단에게 잘 보이려고 몰려들었다. 그중 붉은 얼굴에 옥같이 하얀 이를 가지고 화사하게 웃으며 맵시 있는 옷을 입은 장미가 애교스런 모습으로 다가와 어질고 덕망이 있는 대왕을 모시고 싶다고 청했다. 왕은 장미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이 끌려 금방 따라나서고 싶었다. 그때 흰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할미꽃 노인이 다가와 허리를 굽힌 채 말했다. “저는 서울 밖의 큰길가에 살고있는 백두옹이라고 합니다. 기름진 고기와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불리고, 차와 술로 심신을 맑게 할지라도 상자속에는 원기를 북돋아주는 좋은 약과 병독을 없애주는 독한 약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어 “옛말에 실과 삼베가 있어도 왕골이나 삘기도 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며 결핍에 대비하지 않는 군자는 없다고 하니 대왕께서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한 대신이 왕에게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두고, 누구를 보낼 것인지요”라고 물으니 “영감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어여쁜 여자는 얻기 어려우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며 고민에 빠졌다. 할미꽃이 실망하며 대왕이 총명하여 바른 이치를 아실 것이라 생각하고 왔는데 잘못 찾아온 것 같다. 대체로 임금은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고, 정직한 자를 가까이에 두기가 어렵다. 그래서 맹자도 불우하게 일생을 마쳐야 했다. “예로부터 이러했는데 저인들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한탄했다. 이 말을 들은 목단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잘못했다면서 백두옹을 가까이에 두고 후하게 대접했다고 전한다. 설총에게서 우화를 들은 신문왕이 크게 감탄하며 “그대의 우화 속에는 정말 깊은 뜻이 담겨있소”라고 칭찬하며 “이 이야기를 글로 남겨 앞으로 임금들이 익혀 경계삼도록 하라”고 했다. 설총이 신문왕에게 들려드린 이 말이 ‘화왕계’라는 우화로 수천 년이 지나도록 전해오고 있다. 이후 신문왕은 설총을 더욱 높은 지위에 봉하고, 크고 작은 모든 국사에 대해 자문을 구하곤 했다. ◆설총의 학문원효는 혈사에서 입적하기 전에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이미 자신의 몸을 백명의 원효로 분신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지식을 의식을 통해 백성들에게 바로 전달해줄 수 있는 경지를 공부하려 했다. 그러나 원효는 이미 이 세상과의 인연이 다하여 아들에게 꿈을 통해 마음만 전하고 혈사에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설총이 책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아버지 원효가 나타나 인자한 모습으로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나는 내가 깨우친 것들을 전하려 책으로 기록했으나 백성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먼 길이다. 백성들이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이젠 네가 열어보아라”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야기하고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설총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아버지에게 변고가 닥쳤음을 직감하고, 기림사로 달려가 혈사에서 좌선한 채로 입적한 아버지 원효의 시신을 조용히 모시고 와 다비식을 가졌다. 이어 분가루처럼 잘게 갈아 진흙과 혼합해 생시의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소상을 만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분향하며 추모했다. 설총은 분황사에서 아버지가 기록한 240여 권의 책들을 샅샅이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해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을 헤아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백성들을 위한 아버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설총은 누구라도 쉽게 쓰고, 읽고,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문자 개발에 밤낮없이 몰두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전하고자 했던 진리를 재해석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두문자로 편집하기 시작했다. 설총은 아버지 원효가 남긴 서적들은 불경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를 풀어 해석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어 백성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설총은 현실과 거리가 있는 이상적인 부분은 현실적인 내용으로 재해석하고, 백성들이 알기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내용으로 기록했다. “나라는 백성들의 어버이처럼, 백성들은 나라를 큰 어버이처럼 여기고 살아가야 하며, 내 마음부터 평화를 이루고 이웃과 함께 평화를 열어간다면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실현될 것이다”는 것이 원효와 설총이 주장하는 뜻이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