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버리고 비슬산에서 부처가 된 관기와 도성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포산은 경북 청도군과 대구 달성군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1천84m에 이르는 비슬산이다. 소슬산이라고도 부른다. 삼국유사에 비슬산의 도선사, 인흥사, 용천사, 옥천사 등 중요한 사찰들이 많이 세워졌고, 관기, 도성, 반사, 첩사, 도의,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사 등의 성인이 많이 거주했던 기록이 있어 불교적 성지로 추정된다. 현재도 비슬산에는 유가사, 소재사, 용문사, 용연사, 대견사 등의 많은 사찰이 곳곳에 법등을 잇고 있다. 용연사는 신라 신덕왕 때 보양이 창건한 사찰로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조계단이 조성돼 있다. 이 석조계단의 기단에는 사방에 사천왕상을 세우고, 팔부신중을 양각한 특이한 형식을 보여 보물 제539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정상 부근에는 신라 헌덕왕 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견사터가 발견되어 수차례 중창 과정을 거쳐 지금도 해발 1천m 고지에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석조선각불상과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굴대좌 등의 흔적도 남아있다. 일연스님은 22세부터 44세까지, 또 59세부터 청도 운문사 주지로 가기전인 72세까지 포산의 보당암, 무주암, 묘문암, 인흥사, 용천사 등에 주석하며 포산의 불적들을 정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포산의 두 성인신라시대에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분의 성사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나 함께 포산에 숨어 살았다. 관기는 남쪽 고개의 암자에,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다. 서로 10여리쯤 되는 거리였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늘 서로 왕래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중의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해 굽혀 상대를 영접하는 것 같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다.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나무가 북쪽으로 쓰러졌다. 그러면서 도성이 곧 관기에게로 왔다. 이렇게 여러 해를 지냈다. 도성은 그가 거처하는 곳의 뒤에 있는 높은 바위 위에서 언제나 좌선하고 있었다. 하루는 바위틈으로부터 빠져나와 온몸이 허공으로 올라가버렸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수창군에 가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관기 또한 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두 성사의 이름으로써 살던 곳의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도 그 터 모두가 남아있다. 도성암은 높이가 몇 길로서 뒷날 사람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태평흥국 7년 임오(982)에 승려 성범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 머물면서 만일 미타도량을 열어 50여 년 동안 부지런히 노력하니 여러 번 특이한 상서가 있었다. 이때 현풍의 남자 신도 20여 명이 해마다 모임을 만들어 향나무를 채취해 절에 바쳤다. 매번 산에 들어가 향나무를 채취해서 쪼개고 물에 씻어서 발 위에 펼쳐두면 그 향나무가 밤에 촛불처럼 빛을 발했다. 이로 인해 고을 사람들은 향을 크게 시주한 무리들이 빛을 얻은 해라고 축하했다. 이는 바로 두 성인의 영감이거나 산신령의 도움일 것이다. 산신의 이름은 정성천왕으로 일찍이 가섭불 시대에 부처님의 부탁을 받아 발원 맹세하기를 산중에서 1천 명의 출가를 기다린 후에 남은 과보를 돌려받겠습니다 라고 했다. 지금 산중에는 일찍이 아홉 성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아홉 성인은 관기, 도성, 첩사, 도의, 자양, 성범, 금물녀, 백우사 등이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달빛 밟고 왕래하며 운천을 희롱하던/ 두 늙은이의 풍류 백년이 흘렀나/ 연하 가득한 골짜기에 고목만이 남았는데/ 누운 듯 일어선 듯 찬 그림자 서로 맞는 모양일세.’ 반(搬)의 음은 반(般)인데 우리말로 비나무라고 하며 첩(辄)은 음이 첩(牒)으로 우리말로는 갈나무라 한다. 반사, 첩사 두 분 스님은 오랫동안 바위투성이 사이에 숨어 지냈을 뿐 인간세상과는 교분이 없었다. 두 분은 모두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입고 추위와 더위를 다스리며 습기를 막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렸을 뿐이다. 그래서 반사, 첩사로 호를 삼았던 것이다. 일찍이 풍악(금강산)에도 또한 이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는 곧 옛날 세속을 떠나 숨어 사는 사람들의 뛰어난 운치가 이와 같이 많았음을 알겠으나 따라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포산에 머무르면서 두 스님이 남긴 아름다운 일들을 기록하여 두었는데 이제 그것을 함께 적는다. ‘자모와 황정으로 배를 채우고/ 가린 옷은 나뭇잎, 누에 치고 베짠 것 아니네/ 찬 솔바람 쏴쏴 불고 돌은 험한데/ 애 저문 숲에서 나무꾼 돌아오네/ 깊은 밤 헤치고 달빛 향해 앉으니/ 반신은 시원히 바람 따라 나는 듯/ 떨어진 부들자리 가로누워 단잠 들면/ 꿈속의 혼도 세속에 얽매이지 않네/ 구름 놀다 가버린 두 암자의 빈 터에는/ 산 사슴만 뛰놀 뿐 인적은 드물어라.’ ◆새로 쓰는 삼국유사: 관기와 도성의 피은관기와 도성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사는 이웃사촌으로 어릴 때부터 유달리 정이 두터운 친구였다. 관기와 도성 모두 아버지가 궁궐에서 일하는 대신이었다. 그들은 대신의 아들들이어서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하며 함께 청운의 꿈을 키웠다. 둘은 학문은 물론 사냥술과 무술도 함께 연마하며 형제처럼 의좋게 지내 주변의 따뜻한 시선을 받으며 기대 속에 자랐다. 둘은 경덕왕 때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란히 궁궐에서 일하게 됐다. 착하고 성실해 그들은 윗사람들의 눈에 들어 한 계단씩 승급해 경덕왕 말기쯤에는 제법 중신의 위치에 올라 비중있는 일을 하게 됐다. 혜공왕은 즉위하면서부터 후궁들의 세력간 권력다툼 때문에 크고 작은 시비가 잦아 궁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관기와 도성은 일하는 부서는 달랐지만 퇴근 이후에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객잔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나라의 앞날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며 걱정했다. 그들이 가장 힘들었던 것은 혜공왕이 왕위를 이어받은 때부터 후궁의 오빠였던 대공과 대렴이 왕의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조직적으로 반란을 도모할 때였다. 관기는 혜공왕의 측근, 도성은 대공의 측근에서 일하게 되어 서로 반대편에서 싸워야 하는 입장이 돼 버렸다. 갈수록 둘의 입장이 어려워졌다. 대공이 궁궐을 포위하고, 왕권을 뒤집는 반란을 꿈꿀 때, 상대등이었던 김양상과 김경신은 이미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왕을 시해하는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둘은 미리 알게 됐다. 관기와 도성은 누구편에 서지도 못하고 서로 싸울 수도 없는 입장이어서 저녁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싸우지 않고 나라의 권력구도에 안정을 가져올 방안에 대해 머리를 짜내다가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고 술에 취해 귀가하곤 했다. 그러던 중 어느 하루 관기가 의견을 냈다. “우리 이런 난장판에 명분없는 싸움에 눈치보며 살지말고 머리깎고 산으로 들어가 공부나 하세”라며 푸념하듯 말했다. 도성도 단번에 무릎을 탁 치고는 “그래. 백성들의 안위는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관리로 손가락질 받느니 차라리 산으로 가세”라며 맞장구를 쳤다. 둘은 의견의 일치를 보자 바로 산으로 들어갈 채비를 서둘렀다. 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던 두 친구는 병을 핑계로 사직해야겠다며 왕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혜공왕은 펄쩍 뛰며 “정사가 이렇게 어지러운 때에 유능한 공들이 한꺼번에 물러난다면 이 나라는 어찌되겠소”라며 완강하게 반대하며 둘을 잡아두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힌 관기와 도성은 길게 사연을 적은 편지를 남기고 밤을 틈타 승복을 입고 아무도 모르게 비슬산으로 들어가버렸다. 관기와 도성은 표훈대덕이 읽던 경전을 품속에 간직하고 산으로 들어가 밤이고 낮이고 읽고 쓰기를 반복하며 세상사를 잊고 진리탐구에 매진했다. 비슬산으로 들어온 두 친구는 1년 가량을 함께 먹고 자고 하며 즐겁게 공부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공부가 깊어갈수록 두 사람은 서로 노닥거리는 시간이 깨달음에 독이 된다고 여겨 남과 북으로 거처를 멀리하고 오직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들이 매달린 것은 밀교의 일종이었다. 경을 읽고 외우는 주문으로 힘을 일으키는 법을 익히고 부처가 되는 길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10년이 지나지 않아 멀리서도 서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서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람을 일으켜 풀들이 서로를 향해 일제히 몸을 굽히도록 해 만남을 가지곤 했다. 나중에는 서로가 거주하는 곳의 풀잎 하나를 바람에 띄워 마음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관기와 도성은 이렇게 도를 닦는 일에 매진하다 깨우침이 육신통에 이르러 드디어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부처의 경지에 다달아 구름을 타고 세상 여행을 떠났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해석은 고운기의 ‘삼국유사’, 이범교의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등을 참고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