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활자 그만 읽으라고 노안이 왔네//노안의 친절함에 마음 기울이니/동백꽃 피었다 지는 가슴이나 읽어보라고/노안이 속삭였네//겹겹 붉은 가슴 펴들고 읽기 시작했네/우우우 뭔 그리움 그리도 낭자한 핏빛인가/뚝! 뚝! 뭔 상처 그리도 통째 붉은 눈물인가//어차피 고통은 저마다 품은 공중의 섬 같은 것/위로의 말들은 무심히 흩날리는 진눈깨비 같은 것//누가 동백꽃의 추락을 온전히 해독할 수 있으랴/고통의 질량과 무게는 다 다를 뿐이라는데/누가 누구의 동백꽃 제대로 읽어낼 수 있으랴//다 읽혀지지 않아도 동백꽃은 동백꽃/읽다 보면 자주 눈물이 나기도 하지

「댄싱 붓다들」(2024, 만인사) 전문



‘하롱하롱’ 지는 꽃들이 있다. 이형기는 그의 시 「낙화」에서 꽃이 떨어지는 모양을 그렇게 표현한다. ‘난분분 난분분’ 춤추는 것들도 있다. 고재종의 「첫사랑」을 보자. 시인은 나뭇가지 위에 ‘눈꽃’을 피우기 위한 눈의 몸짓을 난분분하다(亂紛紛하다)에서 ‘-하다’를 빼고 마치 음성상징어처럼 ‘난분분 난분분’ 반복한다. 작고 가벼운 것들은 하롱하롱, 난분분 난분분 어지러이 흩날린다.

반면 송이가 큰 꽃들은 바닥으로 툭, 직하(直下)한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에서 모란은 ‘뚝뚝’ 떨어진다. 붉게 터지는 동백은 더욱 무정하게 진다. 정끝별은 「동백 깊다」에서 “동박새 한자리 날아가 버”려서 “시들지 않은 한 품 겹꽃이 저리 뚝 저버”렸다고 탄식한다. 모란도 동백도 너무 일찍 피는 것들이다. “눈에 묻혀” 얼었던 그것들은 고통 속에 왔다가는 고작 꽃샘추위를 견디다 갈 때도 모지락스럽고 격렬하게 진다. 나태주가 동백꽃 진 자리를 일러 “허공에 피멍 하나 걸렸을 뿐”이라고 노래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는 그런 “동백꽃 피었다 지는” 사연을 읽을 수 있게 된 까닭을 밝힌다. 화자는 노안이 옴으로써 오히려 눈이 밝아지는 역설을 경험한다. 떨어지는 동백이 “통째 붉은 눈물”임을 아마도 그가 젊은 시절이었다면 알지 못했으리라. 자연 사물을 빌어 시인의 정서를 전하는 게 서정시라지만, 그 자연 사물이 시인에게 평범한 인간사에 깃든 삶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때는 그리 쉽게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통을 품은” 채 “공중의 섬”처럼 각자 외롭다는 것, “위로의 말들은 무심히 흩날리는 진눈깨비 같”다는 것, 아무도 ‘나’의 고통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는 것, 해서 타인이 견디는 “고통의 질량과 무게”를 가늠하려면 그만큼 겪은 후라야 한다. 그전까지 눈물은 포즈고 수사(修辭)다.

논리적 비약을 용납하자면, “자주 눈물이 나”지 않는 사람은 물리적 나이와 상관없이 젊다. 눈물이 흔해지기 전까지, 젊은 독서는 “죽은 활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젊음은 무지하고 무정하므로 삶을 이겨낸다. …그랬던 모양이다.



신상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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