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 /경북대 명예교수 정 다산의 “소경에게 시집간 여자”를 다시 평가한다
▲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 /경북대 명예교수 정 다산의 “소경에게 시집간 여자”를 다시 평가한다

우리나라 문예예술에서 계급적 논의가 끓어올랐던 시기는 대부분 사회가 혼란스러운 때였다. 임병 양란과 청나라 개국 이후 탈중화주의 담론이 싹틀 무렵 지배층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이서구·박제가·유득공·성대중 등과 정약용과 이학규 그리고 김려와 이옥으로 이어진 문체반정과 함께 새로운 문예운동이 일어났다. 여항 서민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그들 의식을 담아내는 문예운동이 꿈틀거렸다.
문예활동이 타자적 시각에 합일하지 못하고 단지 선동과 교화의 수단을 뛰어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 한가지 사례로 조선조 다산 정약용의 시문을 들 수 있다. 그는 영조 38년(1762)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현종 2년(1836)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조 13년에 문과 급제 후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형조 참의를 지낸 조선조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분이다. 조선조 사회사상사의 큰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로도 평가받아 왔다.

정약용은 마흔 살부터 쉰일곱 살까지 유배를 살았다. 1785년 을사추조 적발사건, 1791년 신해박해 진산사건 등에 연루되었으나 정조의 호의로 무사하였으나 정조 승하 이후 신유옥사 때에 이승휴와 그의 형 정약종이 참수되고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 전라도 강진 등지로 유배갔다.

다산은 학자로서 사상가로서 또 목민관으로서 당대 양심을 지킨 큰 학자로 평가받아 왔다. 17년이라는 오랜 유배 기간동안 많은 글과 서적들을 통해 사회개혁의 필요성과 시대조류의 변화를 호소하였다. 전라도 강진 동문 밖 주막집 노파의 집에 기거하면서 ‘사의재’라 당호를 붙이고 절망의 시대 기층민들의 삶을 노래한 ‘소경에게 시집간 여자’를 지어 “사의재기“에 남겼다. 서사시 ‘소경에게 시집간 여자’는 다산의 학문적 글쓰기의 사상적 눈높이를 알려주는 대표작이다.

가난한 기층민이나 여성과 같은 약자나 피압박자라는 민초의 눈높이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후 ‘적성촌에서’, ‘기민시’ 3수를 남겼다. 이가환이 다산의 기민시를 읽고 굶주리는 백성의 아픔을 “몽둥이로 때리거나 욕하며 꾸짖는 것보다 더 아프다”고 평했다. 당대의 시각으로 봐도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 토지균등 분배론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임란 이후 노비제도의 몰락과 함께 토지 공유 및 노동에 따른 분배 문제를 제기한 조선 후기의 혁신적 사유였다.
지금까지 다산의 혁명적 사회개혁의 사유 방식을 높게 평가해 왔다. 그러나 최근 다산은 사대부의 눈높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쟁점이 제기되고 있다. 곧 백성을 연민의 대상으로만 여겼지 그들과의 삶이 완전 일치하지 못한 불일치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민중을 옹호하는 듯 하지만 시인의 의식 속에 타자화된 여항의 서민에게 어떻게 함부로 교시와 명령을 내리는 듯한 글을 쓸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시인이 시대의 판관이 아니다. 시를 온전히 해독하지 못하는 눈먼 여항의 사람들은 그 교활한 문예 선전꾼의 유혹에 빠져들게 한다. 과연 문예를 통해 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가? 알량한 입과 글 솜씨로 교훈적이거나 이념을 강요하면 시답잖게 전달될 수도 있다는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 문예예술에서 무슨 사상이나 이념을 담아내어 제법 그럴듯하게 꾸며 독자를 현혹시켜는 사이비 위장전입한 문예인들을 오늘날에도 종종 볼 수 있다.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는 모 시인의 시적 메시지는 가난하고 짓밟혀 사는 사람들을 발로 차지 말라는 엄청난 감동을 일으켰지만 과연 시인 자신은 연탄재를 발로 차며 사는 변두리 사람이었을까? 타자와의 일체성을 잃어버린 위장한 문예예술가들이 서민을 교화하려는 허위성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예 예술이 문예의 허위의 엄숙성을 내치는 좋은 수단으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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