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화상이 불교를 전하고, 이차돈 순교로 신라 국교로 삼아 원효와 의상 등이 대중불교로 승



▲ 신라 불교의 최고 전성기인 경덕왕 당시 건축한 불국사 극락전. 당시 표훈 대사가 주지로 있었다.
▲ 신라 불교의 최고 전성기인 경덕왕 당시 건축한 불국사 극락전. 당시 표훈 대사가 주지로 있었다.


신라의 불교는 단순한 종교로서의 개념을 뛰어 넘어 철학, 학문, 문학, 건축 등의 종합예술로 발전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루는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확장된 국민적 일반사상으로 승화되었다.



이러한 불교를 도입하고 발전시켜 국운을 성장시킨 저변에는 아도화상, 이차돈에 이어 자장, 의상, 원효, 혜공, 혜숙 등의 신라 십성과 원광, 표훈과 같은 고승대덕의 역할이 크다.



신라의 불교는 흔히 호국불교로 대변되면서 국사가 되어 국정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단계까지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최고 인격도량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웃 고구려와 당나라, 말갈족 등의 침략에도 굳건히 맞서 싸웠던 힘의 저력에는 불교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호국불교를 발전시켜 왔던 고승대덕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 이차돈의 목이 떨어지고 흰피가 솟구치는 장면을 묘사한 이차돈순교비.
▲ 이차돈의 목이 떨어지고 흰피가 솟구치는 장면을 묘사한 이차돈순교비.


◆신라 불교의 도입

-아도:아도는 아두라고도 불리며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신라로 들어와 불교를 전파했다. 따르는 승려 3명과 지금의 구미 지역 모례의 집에서 머물다 죽었다고도 전하지만 도리사를 지어 불교를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도는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곳에 도리사라는 절을 지어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다. 도리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아도화상의 석상, 사적비, 탱화, 세존사리탑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이외에도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이 좌선했던 바위로 전해지는 편편하게 다듬어진 좌선대, 아도화상이 입적한 곳이라는 금수굴 등이 있다.

▲ 원광 법사의 부도탑으로 전하는 경주 안강읍 금곡사 부도탑.
▲ 원광 법사의 부도탑으로 전하는 경주 안강읍 금곡사 부도탑.


-염촉:염촉은 불교의 황무지였던 신라에 목숨을 던져 불교의 씨앗을 심은 인물로 이차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법흥왕 이전에는 불교를 신봉하려면 몰래 섬기는 수밖에 없었다. 527년 신라의 하급관리였던 이차돈이 불교 공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기회로 불교를 공인했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꽃을 피웠고, 불교는 문학과 철학, 문화예술까지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천년의 사직을 이끌어가는 국가통치의 이념이 되었다.



▲ 의상대사가 부처님 진신을 만났다는 낙산사.
▲ 의상대사가 부처님 진신을 만났다는 낙산사.


◆신라 불교의 의미와 중흥

신라의 불교는 단순한 종교만의 의미에서 벗어나 사상적인 철학으로 발전하면서 학문과 조각, 미술, 건축 등 종합예술까지 성장을 가져오면서 안정적인 정치를 이끌어내고, 호국불교로 정착해 삼국통일의 근간이 되었다.



이러한 불교는 신라십성을 비롯한 원광, 신충, 명랑, 심지, 월명사, 충담 등의 훌륭한 고승들이 나타나 귀족불교에서 대중불교로 승화 발전시켜 국민의 정서적 배경이 될 수 있었다.

▲ 아도화상.
▲ 아도화상.


-원효: 원효는 7세기에 활약한 승려로 출가 이후 환속하여 무애행을 통한 정토신앙 확산에 힘쓴 인물이다. 속성은 설씨이고, 어렸을 때는 서당, 신당이라는 이름이 있다. 파계하고 환속한 뒤에는 소성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효라는 법명은 새벽이라는 뜻으로 불교를 빛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스스로 지었다.



원효는 15세에 출가,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 태어난 곳에 사라사를 세웠다. 낭지와 혜공, 보덕 등의 선승들에게서 불법을 배우며 스스로 깨우치기 위한 고행을 했다. 한국불교사상 발달에 크게 기여해 해동보살, 해동종주라고도 불린다.

▲ 이차돈.
▲ 이차돈.


문무왕 시대 661년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당항성에서 깨달음을 얻어 돌아와 분황사에 주석하며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등의 100여 종 24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고려 숙종이 대성화쟁국사 시호를 내려 지금도 분황사 터에 대성화쟁국사비를 건립했던 대좌가 남아 있다.

▲ 혜숙.
▲ 혜숙.


-의상: 의상은 1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중국의 지엄을 찾아가 수학했는데 학문적인 이론에서는 이미 스승을 앞질러 지엄도 깜짝 놀라워하면서 의상을 도반으로 삼아 수도에 임했다.



의상은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고향의 중생들을 구하라는 게시를 듣고 서둘러 신라로 돌아와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문무왕에게 전해 50만 대군이 공격해오는 전쟁에 대비했다.



이어 의상은 양양에서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벼랑에 좌선하며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 낙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의상은 또 꿈속에서 용왕이 주었던 구슬을 사리함에 넣어 모시고 태백산에 부석사를 지어 밤낮으로 염불을 외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의상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하나같이 훌륭하게 성장해 나라의 기둥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특히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 열 명의 승려를 의상의 10대 제자라고 불렀다.

▲ 안함.
▲ 안함.


-자장과 표훈: 자장은 신분이 상당히 높은 신라 진골 대신의 아들로 태어나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황제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덕망이 높은 승려였다.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그를 돌려줄 것을 요청해 돌아오게 할 정도로 자장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은 분황사에 머물며 대국통이 되어 왕실에서 법회를 주관하기도 하고, 황룡사9층목탑을 건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목탑이 준공되고 황룡사 제2대 주지로 주석했다.



반면 대덕 표훈은 삼국유사에서 천제를 만나 왕의 뜻을 전하는 등으로 천궁에까지 드나드는 술법을 펼치는 도력이 높은 승려로 전해진다. 표훈은 의상대사의 십대제자 중의 하나로 불국사에 머물면서 아들이 없던 경덕왕의 심부름으로 천제를 만나 부탁하여 혜공왕을 낳게 했다.

▲ 의상.
▲ 의상.


-혜숙: 혜숙 스님은 호세랑의 무리에 섞여 지냈다. 혜숙이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화랑의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혜숙은 적선촌에 은거하여 20여 년을 보냈다.



혜숙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국선인 구참공에게 군자의 도를 깨닫게 했다. 구참공이 이에 대해 진평왕에게 보고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찾아 들이도록 하였지만 신비한 도술로 사자를 속여 피했다. 또 장례를 치렀는데 다른 곳에서 나타나 그의 무덤을 파보니 신발 한 짝만 나오는 등 신비스런 행동을 보였다.

▲ 표훈.
▲ 표훈.


-혜공: 혜공 스님은 천진공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파의 아들이었다. 어릴 때 이름은 우조였다. 우조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이름을 혜공이라 하였다. 혜공은 작은 절에 머무르며 미친 듯이 크게 취해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댔다. 그래서 부궤화상이라 불렀다. 거처한 절도 그런 까닭에 부개사라 했다.



또 절의 우물 가운데 들어가 몇 달 동안 나오지 않기도 하였다. 나올 때면 언제나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먼저 솟구쳐 나왔기 때문에 절의 승려들이 이를 보고 나오리라는 신호로 알았다. 그렇게 나왔는데도 옷이 젖지 않았다. 신령스런 자취가 자못 많았으며 마지막에는 공중에 떠올라 입적을 알렸다. 사리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 사파.
▲ 사파.




◆신라의 고승대덕

-원광: 유학을 통달했던 원광이 중국으로 건너가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하였더니 칙명으로 허락하였다. 이후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불경을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공부에 전념해 그의 해박함이 사방으로 알려지자 설법을 듣기 위해 승려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의 명성이 중국의 황궁에까지 높이 드날렸다.



신라 본국에서 이 소문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원광을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후하게 노고를 위문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원광이 신라로 돌아오니 진평왕도 그를 만나보고 거듭 공경하고 존경하여 마치 성인처럼 떠받들었다. 원광은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왕에게 올리는 글 등의 오고 가는 국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 원효.
▲ 원효.


-명랑: 명랑은 자장율사의 누이동생이 낳은 삼형제 중 막내다. 명랑이 중국으로 건너가 무외삼장으로부터 대부분의 공부를 전수받을 무렵, 신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신라로 돌아왔다. 경주 남산기슭에 있던 자신의 고향집을 헐어 서둘러 절을 지었다. 명랑이 지은 절은 불상과 함께 모두가 금빛으로 빛나 사람들이 금광사라 불렀다.



문무왕 8년 668년에 당나라의 50만 대군이 신라를 공격해오자 명랑은 유가명승들과 함께 밀교의 진언을 외워 문두루비법을 시전해 풍랑을 일으켜 당나라 수군들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 혜공.
▲ 혜공.


-충담: 하루는 경덕왕이 훌륭한 덕행으로 소문이 자자한 충담 스님을 모셔오게 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노래를 지어줄 것을 청했다. 이에 충담사는 흔쾌히 답하고 그 자리에서 안민가를 지어바쳤다.



경덕왕이 충담의 노래를 듣고, 그를 존경해 나라의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지만 충담은 거듭 사양하고 총총히 일어나 자리를 떴다.

▲ 자장.
▲ 자장.


-월명: 월명은 하급관리의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체구가 단단하고, 총명하며 무술이 뛰어나고 활달한 성격으로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항상 많이 모여들었다.



월명은 얼굴이 여자처럼 잘 생기고 단아한 체구였지만 그의 피리소리는 심금을 울려 하늘의 달조차 걸음을 멈추고 피리소리를 들었다. 경덕왕 때 나라에 변고가 일어나자 도솔가를 지어 피리를 불어 해소했다.



-심지: 심지는 신라 41대 헌덕왕의 아들이다. 아버지 헌덕왕이 형제들과 함께 조카 애장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자 불문에 귀의하기로 마음먹고 팔공산 깊숙이 들어가 계곡에서 수행에 매진했다. 심지는 진표 율사가 수행했던 점찰법을 따라 수행하며 법회에 참가했다가 부처님의 간자를 얻어 팔공산으로 돌아와 동화사를 창건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