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96>원광법사. 하

발행일 2021-01-11 09:24:44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중국에서 공부한 원광법사 국사되어 나랏일 도맡아, 화랑 세속오계 지어 1천500년 지표로

건물자체가 보물 제835호로 지정된 문화재 운문사 대웅보전. 대웅보전에는 보물 비로자나삼신불회도와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가 있다.


삼국유사는 원광법사편에서 당의 속고승전과 고본 수이전에서 소개한 내용들을 그대로 싣고,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도 옮겨 놓았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 없어 다 나열하니 독자가 판단하라고 주석을 달았다.

수이전에서 원광법사는 설씨이며 혼자 살면서 삼기산에서 조용히 불법을 배웠다.

속고승전에는 박씨이며 중국에서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드러난다.

수이전은 또 원광법사의 도력을 나타내면서 여우가 신의 목소리로 원광에게 후세에 서로 계를 주기로 약속하는 장면을 그려 신비롭다.

법사의 글재주가 뛰어나 나라에서도 인정받았다는 내용은 같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평생의 지표를 삼을 세속오계를 내렸다는 내용을 소개해 지금까지 그 뜻이 전하고 있다.

속고승전의 99세 입적과 다르게 수이전은 84세에 입적한 것으로 기록하고, 삼국사기 열전은 80세쯤에 입적해 금곡사에 부도탑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지금 경주 금곡사의 부도탑을 원광법사의 흔적으로 이해하고 학자들도 학생들과 함께 답사하고 있다.

경주시는 석장동에 청소년수련시설 화랑마을을 건설했다.

다양한 체험과 공부를 통해 나라의 동량으로 자라날 청소년 심신단련의 장을 마련하고, 전국의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게 시설을 공개하고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원천으로 평가되는 경주화랑마을 출입구의 솟을대문. 화랑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경주시가 설립해 운영 중이다.


◆삼국유사: 원광법사

동경(경주)의 안일호장인 정효의 집에 있는 고본 수이전의 원광법사전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로 서울 사람이다.

처음에 승려가 돼 불법을 배웠는데 30살이 되자 조용히 살면서 수도할 것을 생각하고 홀로 삼기산에 살았다.

그 후 4년이 지나 어떤 비구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암자를 짓고 2년을 살았다.

그의 사람됨이 모질고 사나웠으며 주술로 수련하는 것을 좋아했다.

원광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불경을 외우는데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의 수행은 참으로 좋구나. 대체로 수행하는 자는 많으나 법대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 이웃에 있는 비구는 주술을 닦고 있지만 시끄러운 소리가 다른 사람의 고요한 사념을 뒤흔들고,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돼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다. 법사께서 나를 위하여 그 사람에게 말을 해 옮겨가게 해 주게나. 만일 오래 머문다면 어쩌면 내가 갑자기 죄 되는 일을 저지를 것 같다”고 했다.

이튿날 법사가 가서 “제가 어젯밤에 신의 말을 들었는데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그 비구가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에 현혹됩니까? 법사께서는 어찌하여 여우귀신의 말을 듣고 근심합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날 밤 신이 다시 와서 “전에 내가 한 말에 대해 비구는 무어라고 대답하던가?”라 묻자 법사는 신이 크게 화를 낼까 두려워하여 “아직 말을 못했으나 만약 굳이 말을 하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신라시대 유적으로 남은 보물 제317호와 318호 운문사 석조여래좌상과 석조사천왕 석주를 안치하고 있는 목조건물 작압전.


신이 “내가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째서 말을 보태는가? 그대는 단지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게나”라고 말 한 후 가버렸다.

밤중에 벼락 같은 소리가 났다.

그 다음날 가서 보니 산이 무너져 비구가 거처하던 암자를 덮어버렸다.

그리고 신이 “법사가 이곳에만 있으면 자기는 이로운 수행을 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덕은 없을 것이네. 어찌하여 중국에서 불법을 취하여 이 나라의 갈 길을 못 찾는 무리를 인도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법사가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이 저의 소원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고 험해서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고 답하자 신이 중국으로 갈 계책을 자세히 가르쳐 줬다.

법사가 그 말을 따라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에 널리 통달하고 겸하여 유학도 배웠다.

진평왕 22년(600) 경신에 법사가 신라로 돌아올 행장을 정리해 중국에 왔던 조빙사를 따라 본국으로 돌아왔다.

법사가 신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로 갔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충성을 맹세한 내용을 돌에 새겨 다짐했다.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된 임신서기석의 모양을 본떠 세운 비석이 화랑마을 언덕에 풍월정과 함께 서있다. 임신서기석은 크기 약 30㎝의 돌로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밤중에 신이 나타나 “바다와 육지의 길을 다녀옴이 어떠하던가?”라고 하니 법사가 “신의 크신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고 대답했다.

신이 “나 또한 법사에게 계율을 주겠네”라고 하면서 윤회하는 세상에서 서로 구해주자는 약속을 했다.

신이 “3천 년을 살아왔지만 덧없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얼마 안 가서 그 고개에 이 몸을 버릴 것이니 법사는 와서 멀리 떠나는 내 영혼을 전송해 주시게나”라는 말을 남겼다.

약속한 날을 기다려 법사가 가서 보니 옻칠한 것과 같은 검고 늙은 여우 한 마리가 헐떡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 조정의 왕과 신하들이 그를 매우 존경해 스승으로 모시니 법사는 늘 대승경전을 강론했다.

이때에 고구려와 백제가 늘 변방을 침략하므로 왕이 이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에게 구원병을 청하는 글을 짓게 했다.

황제가 그 글을 보고 30만 명의 군사를 내어 친히 고구려를 정벌했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까지도 두루 통달했음이 알려졌다.

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 서쪽에서 장사를 지냈다.

또 삼국사기 열전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귀산이라고 하는 현명한 분은 사량부 사람인데 같은 마을의 추항과 친구가 됐다.

두 사람이 서로 “우리들이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을 불러들일 것이다. 어진 분을 찾아가서 도를 물어보자”라고 했다.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이 그의 처소에 나아가 “속된 사람들이라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 해주시면 평생의 지표로 삼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원광법사가 주석했다는 운문사의 출입구 일주문으로 통용되는 범종루.


이에 원광이 “세속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가 있으니 첫째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요. 둘째가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친구를 사귐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살생을 가려서 해야 하니,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마라”고 말했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이 말씀을 받들어 행해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두 사람이 싸움터에 나아가 모두 국가에 특출한 공을 세웠다.

또 건복 30년(613) 계유 가을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가 와서 황룡사에 백좌도량을 열고 여러 고승을 청해서 불경을 강의했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원광은 성품이 텅 비고 허정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말할 때는 항상 미소를 머금었고 성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아져 수레를 타고 대궐 안까지 들어가니 당시 덕망과 인의를 갖춘 훌륭한 분이 많았지만 그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

그의 뛰어난 문장은 한 나라를 기울일 정도였다.

나이 80세께 정관 연간에 세상을 뜨니 부도는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

당전에서는 황륭사에서 입적했다고 했으나 그 장소가 분명하지 못하다.

아마도 황룡사가 잘못 전해진 듯하니 이는 마치 분황사를 왕분사로 한 예와 같다.

진나라와 수나라 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불도를 배운 자는 드물었고 설혹 있다 하더라고 크게 떨치지 못했다.

원광 이후에는 중국으로 유학 가는 사람들이 계속하여 이어졌으니 이는 바로 원광이 길을 열었던 것이다.

전국 청소년수련시설로 조성된 경주 화랑마을의 전시관. 신라시대 성벽의 형식으로 건축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광법사의 도력

화랑 귀산과 추항이 힘들게 공부하고 수련에 매진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두 친구는 “이제 제법 실력을 갖췄는데 우리 스스로 노력으로는 한계에 부딪쳤다. 뛰어난 스승의 가르침을 얻어야 더 발전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받기로 하고 먼저 법사의 실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두 화랑은 법사가 왕궁에서 황룡사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급습했다.

그러나 법사는 여덟 명의 법사로 나뉘어 귀산과 추항을 거꾸로 공격해 꼼짝하지 못하게 손발을 묶어 꿇어앉게 했다.

귀산과 추항이 그제야 엎드려 절하며 높은 경지에 이른 법사의 덕을 칭송하며 배우고 싶은 열망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사죄하고, 자신들을 제자로 받아주기를 간곡하게 청했다.

삼국유사에서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소재한 것으로 기록된 금곡사의 삼성각.


법사는 다시 하나의 몸으로 돌아와 “부족한 솜씨로 스승을 시험하려는 것은 잘못된 예절”이라며 꾸짖고 반대로 그들을 시험했다.

얼음을 깨고 물속에서 3일을 버티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귀산과 추항은 이를 견뎌 원광법사에게 무술 가르침을 받은 최초의 제자가 됐다.

법사는 제자들에게 심신을 함께 수련하게 하며, 평생 갖춰야 할 덕목으로 세속오계를 일러줬다.

귀산과 추항은 법사의 가르침을 평생의 계율로 삼아 다시 수련에 매진해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경주 화랑마을의 수련시설 일부로 조성된 산책로.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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