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

에녹 원장

아재 개그 중에 영어로 ‘물은 셀프’고 ‘군만두는 서비스’란 말이 있다. 웃자고 만든 말이겠지만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겐 진실로 다가올 수 있다. 우리말이 아닌 외국어란 점에서 확신이 없는 경우, 흔히 지식층이나 유명 연예인의 말들이 사실인 것처럼 자리하기도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영어의 쓰임이 갈수록 많아지다 보니 한국식 영어가 원어민 영어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의 자리매김은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식 영어(Korean English)’로 고착화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을 ‘농민 반란군(insurgent fighters)’로 번역한 영어식 표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최근 ‘역사저널 그날’이란 프로그램의 전문가 패널들은 이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해석을 주장한다. 특히 심리학자 김태훈 교수는 ‘일본의 집단주의’와 달리 ‘우리’라는 ‘관계주의 문화’인 한국인만의 특수한 문화를 잘못 이해한 것에서 오는 오역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물며 같은 한국말임에도 그 의미마저 생소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것은 지역적 문화와 특수성에 기인한 방언(사투리)이다. 사전적 의미로 방언은 ‘지역이나 사회적 계층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한 언어의 분화체’라고 정의되고 있다. 재미난 실례로 충청도 방언 중 ‘알았슈/그류’와 경상도 방언 ‘언지요/어데요’를 들 수 있겠다. 약속을 정하는 경우, 예로든 두 지방의 방언은 소통부재를 여실히 드러낸다. 충청도의 ‘알았슈’는 단지 알고 있다는 의미일 뿐 약속에 나타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드시 ‘그류’라고 해야만 약속에 응한 것이다. 후자인 경상도 방언은 억양에 따라 약간의 의미 차이는 있지만 통상적으로 제안이나 약속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를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기다리는 어리석음은 과연 누구 탓이어야 하는지 의문스럽기조차 하다.

언어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표준어도 하나의 방언’이라고 한다. 단지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나 사회 중추세력들 또는 단순히 대다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에 다른 방언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최근 ‘소통부재의 시대’란 말이 흔하게 쓰이고 있다.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의 ‘세대간 소통부재’ 그리고 진보와 보수의 ‘진영간 소통부재’의 견고한 틀은 각자의 의미 속에서 대화를 이끌어 간다. 아집과 독선에 가까운 자기중심적 사고는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선악의 이분법적 논리 속에서 죽기 살기의 상대방 비방과 공격만이 난무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바벨탑 사건처럼 사회 전반이 혼란의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다.

범야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토부 장관으로 임명된 변창흠 후보로 인해 ‘야당 패싱 장관’이란 신조어마저 생겼다. 이번 정부 들어 야당 동의 없이 임명되는 26번째 장관급 인사라는 점은 ‘소통부재의 행정’임을 방증하고 있다. 잘못된 검증과 정부 부처 사이의 소통부재에서 오는 행정 업무의 미숙은 임명 후에도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3차 재난지원금 지급 문제 역시 예외는 아니다. 특수고용직 재난지원금 지급이후 소상공인을 중심으로 한 선별지급과 전 국민 지급이라는 상반된 주장은 정치적 논리 속에서 세대와 진영 모두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국민의 힘 유승민 국회의원은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은 국민의 세금으로 매표행위를 하는 악성 포퓰리즘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더불어 민주당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모든 국민에 대한 보편지급을 통해 경제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확장재정정책을 이어가야’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둔 시점이라 더더욱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견 양측의 주장 모두 이해와 설득력을 갖고 있다. 국가 재정과 국민을 위한 각 진영의 고민도 충분히 읽혀진다. 하지만, 3차 지급에 대한 논란이 이처럼 분분한 시기임에도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이 4차 재난 지원금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시기상조이자 ‘배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을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똑같은 말을 해도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것은 소통의 수단인 언어가 갖는 본질적 한계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간의 의미적 가치가 다를 때 ‘소통부재’는 당연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숨겨둔 의도 속에서 내뱉는 말과 정책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 진정한 의사소통일 수는 없다. ‘소통부재의 시대’에 ‘우리’라는 관계개념이 더없이 유의미하고 중요한 이유이다. 모든 국가 정책과 정치의 중심에 ‘내 편’이 아닌 진정한 국민들이 있을 때 소통의 시대가 올 것이라 믿는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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