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새로 나온 시집 한 권으로 달래보자. 갓 등단한 시인에서 부터 이미 수십 권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들까지 다양한 삶의 이야기들이 서점가를 장식한다.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황성희 지음/현대문학/212쪽/1만 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서른한 번째 시집 황성희의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가 출간됐다.

불연속적인 일상의 파편을 실어 나르는 충만한 에너지로 단순한 존재성을 넘어 초월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황성희 시인의 내밀하고 진실된 독백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작품들이 묶인 시집이다.

등단한 뒤 두 권의 시집을 통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와 그 안의 개인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사회와 공명하는 독특한 시세계를 펼쳐온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는 7년 만에 내놓는 신작 시집이다.

‘현대문학’ 올해 2월호에 발표한 작품을 비롯해 총 50편의 신작시와 에세이로 구성됐다. 이번 시집은 시인의 특장점이라 할 만한 도발적이고 리듬감 있는 어조, 날카로운 사회의식과 문제적 발화가 눈에 띄던 기존의 작품세계를 확장해, 개인의 오래된 기억이 만든 현재형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한 여성의 삶을 덤덤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가 엿보인다.

시적 화자는 유년의 기억이라는 ‘올가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성인이 되면서 자신을 ‘지울 수 없는 얼룩’, ‘아직 악몽을 꾸는 어린 사람’으로 인식하고, ‘자라지 않는 것을 선택’하며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비성장을 거듭한다.

화자를 위협해온 가족 구성원을 향해 시들지 않는 적의를 품고서 수천 번 연습했던 ‘거사’를 치르려고 하는 ‘소녀’의 이 위험한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는 어두운 방에 웅크린 아이의 윤곽이 뚜렷해질수록, 기시감은 짙어지고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흡사 TV나 뉴스의 사회면에서 자주 마주치는 현실세계의 사건 사고와 묘하게 닮아 있는 듯한 시인의 시들은 현실과 괴리 없이 고유의 방식으로 시사성을 띠면서 어느새 우리의 이야기로 치환되며, 오랜 고민과 문제의식을 전면에 드러내게 된다.

또한 오직 ‘시’라는 현실 속으로 숨으려고만 했던 스스로와 화해하고 유년의 복원과 환기를 통해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거침없고 솔직하게 보여준다.

◇탱자꽃/이태기 지음/빨강머리앤/138쪽/1만 원

태양아 작열하라/파도야 거세어라/한 방향 응시하는 세 개의 섬//땅속 마그마가 맺어준/화산섬의 맏형/태안반도 서쪽 55킬로/분연히 날고 싶은 격렬비열도를 아시나요//철책 없이 조업하는 망망대해/정의는 있을 것인가/굳센 주상절리 위/동백꽃은 더욱 붉었다//해류처럼 뻗쳐온/일각 매입의 마수/놀란 물결 박차고 날아오를 때/아련히 펼쳐지는 옛 대국의 꿈이여/북북서로 북북서로 한반도를 떠메고/삼각의 편대 비행/공대지는 장전 완료다

‘격렬비열도’ 중에서

시집 ‘탱자꽃’은 언어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주옥같은 시어들을 가득 담은 책으로, 도서출판 빨강머리앤 시인선 초대 시집으로 발간된 작품이다.

이태기 시인은 ‘바둑’선생이다. 그의 첫 시집 ‘탱자꽃’은 마치 바둑판 앞에 앉아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며 묘수를 찾는 듯, 세상을 탐미하고 끝끝내 시어를 집어 들어 수를 둔다. 그에게 있어 한 편의 시는 곧 한판의 바둑이다.

세상의 작은 외침과 마음속 가녀린 떨림도 그냥 외면하지 않는다. 더 깊이 귀 기울이고, 더 많이 떠올리며, 시어의 성을 완성한다. 그렇게 시인은 세상에 몰두한다. 자신의 사명은 곧 시를 읽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이 되고, 기억으로 영글어 알알이 맺힌다.

시집 ‘탱자꽃’은, 시인이 삶을 즐기고 성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런 시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사람을 미덥게 한다. 시인은 시를 통해 더 많은 타인을 자신의 가슴으로 들어오게 하고, 그만큼 세상을 넓게 발화시킨다. 그래서 그의 시는 더욱 빛을 발한다. 사물과 현상을 읽어내는 시선의 구체성과 심오함이 느껴진다. 시인은 사물을 통해 삶의 여유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독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말해주고 있다.

저자인 이태기는 영남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지난해 4월 다향정원문학회를 통해 등단했으며 다향정원문학회 2019년 올해의 작가상, 다향정원문학회 2020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시 밴드 자작나무의 공동리더로 활동하고 있으며 공저로 동인지 ‘우리의 희망을 품으며’가 있다.

◇계절의 문양/박우담 지음/황금알/128쪽/1만 원

비 다음에 진흙이 있고 진흙 다음에 신발이 있고 신발 다음에 비누가 있고 비누 다음에 손이 있다 아찔하다 다음에 다음에 다가오는 건 우산이다 우산 다음에 수건이 있고 수건 다음에 눈물이 있고 눈물 다음에 이별이 있다 아찔하다 다음에 다음에 이별 다음에 내가 있고 내 다음에도 내가 있고 내 다음에 내 다움이 있다 아찔하다 내 다움이 있고 내 신발이 있고 내 비누가 있고 내 눈물이 있다 내 다움에 아찔한 내가 있다…‘아찔하다’ 전문

박우담 시인은 이 시에서 연쇄법을 활용한다. 비→진흙→신발→비누→손으로의 연결이 첫 번째 흐름이다. 우산→수건→눈물→이별의 연쇄가 두 번째 흐름이다. 우리는 이상의 두 개의 흐름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이 ‘아찔하다’에서 ‘내 다음’과 ‘내 다움’을 연결하는 대목은 단순한 언어유희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나’와 결합해 등장하는 신발, 비누, 눈물 등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 다움’이자 ‘아찔한 나’ 자체이다.

박우담의 시를 읽는 일은 시 본연의 가치를 확인하는 과정과 다른 말이 아니다. 시인의 작품에는 ‘삶’이 있다. 그가 형상화하는 ‘삶’은 늘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이어서 때로 불편함을 야기할 수도 있으나 그러하기에 진실에 가까이 다가선다. 이번 시집은 시가 ‘언어이자 ‘음악’이며, ‘은유’이자 ‘상상력’임을 또한 ‘역사’임을 넉넉하게 입증했다.

시인이 추구하는 시는 또 그것이 추구하는 미학에는 거창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시 세계는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박우담의 시는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갈 뿐이다.

1957년 진주에서 태어나 2004년 ‘시사사’로 등단한 시인은 ‘구름트렁크’, ‘시간의 노숙자’, ‘설탕의 아이들’, ‘계절의 문양’ 등의 시집을 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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