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왕이 죽자 왕비 계화왕후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세워

▲ 무장사는 경주시 암곡동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며 국립공원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무장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은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비문에 무장사라는 기록을 통해 알게 됐다. 무장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12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무장사는 경주시 암곡동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며 국립공원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무장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은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비문에 무장사라는 기록을 통해 알게 됐다. 무장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12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무장사 미타전은 신라 39대 소성왕의 비 계화왕후가 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세운 암자이다.

삼국유사에서 왕후가 소성왕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슬퍼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했다는 구절이 보인다.

소성왕이 즉위 1년 만에 죽었다는 것과 왕비의 피눈물이라는 단어로 짐작해보면 예사로운 죽음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3세에 신라 40대 왕위에 올랐다.

삼촌 언승의 섭정으로 나라를 운영했다.

그러나 결국 41대 헌덕왕과 42대 흥덕왕이 된 삼촌 언승과 수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신라 최초의 근친 간 살해로 왕위를 찬탈한 사례다.



흥덕왕 이후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으로 이어지는 혈육간의 왕권 쟁탈을 위한 전쟁은 신라하대 최고의 비극으로 기록된다.



실질적인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 패망은 원성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서서히 시작됐다는 학자들의 분석을 틀렸다고 부정하기 어렵다.

계화왕후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미타전 설립 이면의 이야기를 추정해 본다.



▲ 무장사지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모습. 일제강점기에 3조각으로 파손된 채 발견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조성한 비를 현지에 남은 귀부와 이수로 복원해두고 있다. 보물 제125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쌍귀부 위에 12지신상을 양각으로 새긴 것이 특이하다.
▲ 무장사지아미타불조상사적비의 모습. 일제강점기에 3조각으로 파손된 채 발견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조성한 비를 현지에 남은 귀부와 이수로 복원해두고 있다. 보물 제125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쌍귀부 위에 12지신상을 양각으로 새긴 것이 특이하다.


◆삼국유사: 무장사 미타전

서울(지금의 경주)에서 동북쪽으로 20리 가량 떨어진 곳에 암곡촌이 있는데 그 북쪽에 무장사가 있다.

제38대 원성대왕의 돌아가신 아버지인 대아간 효양 즉 추봉된 명덕대왕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추모해 세운 절이다.

골짜기는 너무도 기이하여 마치 깎아서 세운듯하다.

절이 자리한 곳은 어둡고 그윽하여 저절로 텅 비어 순박한 마음이 생길 것이니 사문이 도를 즐길 수 있는 신령스런 곳이다.



절의 위쪽에는 아미타를 모신 옛 불전이 있다.

소성대왕의 비 계화왕후는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근심과 증오로 마음은 애통함과 비통함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했다.

그래서 지아비인 소성왕이 운명의 통곡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도록 명복을 빌고자 생각했다.

서쪽에 아미타라고 부르는 큰 성인이 있어 지극정성으로 귀의하면 잘 구원하여 맞아준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일진대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라 하고는 왕후가 입던 여러 가지 옷을 희사하고 궁중에 쌓아두었던 재물을 모두 털어서 이름난 장인을 불러들여 미타상 하나를 만들게 하였으며 아울러 신중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노승 한 분이 있었다.

어느 날 꿈에 부처가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향해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본 뒤,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라고 생각했으나 속으로만 생각하고 남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바위가 험준하고 계곡 물이 빠르게 부딪쳐 흐르는 곳이므로 장인들은 눈여겨보지도 않고 다들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 양식이 독특해 훼손이 심하지만 보물로 지정된 미타전조상사적비의 모습. 귀부가 두 마리의 거북이로 조성되어 있고, 귀부 위에 12지신상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 양식이 독특해 훼손이 심하지만 보물로 지정된 미타전조상사적비의 모습. 귀부가 두 마리의 거북이로 조성되어 있고, 귀부 위에 12지신상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급기야 터를 닦자 곧 평탄한 곳을 얻어 불당을 세울 만했다.

완연히 신령스런 터와 다름없어 보는 사람마다 깜짝 놀라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래(고려시대)에 와서 옛날의 미타전은 허물어졌으나 절만은 남아 있다.



세간에서 전하기를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묻어버렸으므로 무장사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무장사 금당터. 무장사가 먼저 건축되고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왕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세운 미타전이 무장사 뒤편에 있다.
▲ 무장사 금당터. 무장사가 먼저 건축되고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왕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세운 미타전이 무장사 뒤편에 있다.


◆무장사지

무장산 초입의 무장사가 먼저 설립되고, 그 이후에 미타전이 세워졌다.

나라에서 사찰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무장사를 수리하는 명분으로 무장사 뒤편에 미타전을 지었던 것이다.



미타전의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신라 39대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장사 뒤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시고 그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원성왕이 태자로 책봉했던 아들들이 차례대로 죽어버리자 태자로 책봉했던 첫째 아들 인겸의 아들인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 줘 소성왕이 즉위한 것이다.

그러나 소성왕도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 절터 주변에는 아직도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다.
▲ 절터 주변에는 아직도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다.


소성왕의 죽음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사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젊은 왕이 즉위 1년 만에 죽었다는 것과 왕비가 피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왕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을 짐작할 뿐이다.



원성왕 후손들의 비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이 13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 언승과 수종, 아버지의 친동생들에게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에 죽음을 당한다.



소성왕의 여동생은 오빠를 죽인 수종과 결혼해 10여년을 왕비로 함께 살았다.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그 양식이 독특하다.

비의 받침돌 귀부가 쌍귀부로 조성됐고, 귀부의 윗부분에 12지신상을 돌아가며 새겼다. 비석의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각한 것으로 조사됐다.





▲ 무장사와 미타전의 기초석으로 보이는 돌이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다.
▲ 무장사와 미타전의 기초석으로 보이는 돌이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발견된 사적비의 비문에 미타전을 세운 내력이 기록돼 있다.

3조각으로 파손된 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지금 현지에는 원본에 의해 제작한 비문과 남아 있는 귀부와 훼손된 이수로 복원해 두고 있다.

보물 제125호로 지정됐다.





▲ 무장사지는 암곡리 마을에서도 계곡으로 30분은 걸어야 만날 수 있다. 등산로를 따라 늦단풍이 한창이다.
▲ 무장사지는 암곡리 마을에서도 계곡으로 30분은 걸어야 만날 수 있다. 등산로를 따라 늦단풍이 한창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비운의 소성왕 부자

신라 38대 원성왕 김경신의 고민이 깊어졌다.

경신은 내물왕의 12세손이었지만 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어렵게 왕위에 앉았지만 왕권을 강화해 왕위를 장자에게 물려주고,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고 싶었다.



그래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기 위한 독서삼품과를 시행하는 한편 왕권에 대한 절대적 존엄성을 알리기 위해 당나라 대신들이 잡아가는 분황사 등의 호국룡을 다시 찾아오는 등의 다양한 설화까지 만들어 퍼뜨렸다.



그러나 원성왕의 왕권안정을 위한 노력은 그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첫째 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왕위를 잇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절망한 왕은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그 또한 아비보다 먼저 죽음을 맞았다.



원성왕은 고심 끝에 첫째 아들의 장자 준옹을 태자로 임명하고, 준옹은 39대 소성왕으로 등극했다. 준옹은 현명하고 사리에 밝았지만 몸이 약하고 소심한 편이었다. 또한 욕심이 지나쳐 형제들에게도 위엄을 지키지 못하고, 동생들에게도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반면 준옹의 동생 언승은 달랐다. 몸이 민첩하고 무술에 통달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휘어잡는 지도력과 친화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동생 수종과 충공도 둘째형인 언승을 잘 따랐다.





▲ 무장사와 미타전 바로 옆에 있는 깊은 계곡의 모습. 푸른 색을 띠는 바윗돌로 가득해 이채롭다.
▲ 무장사와 미타전 바로 옆에 있는 깊은 계곡의 모습. 푸른 색을 띠는 바윗돌로 가득해 이채롭다.


이 때문에 소성왕과 언승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병권과 인사권 등의 실질적인 권한도 언승이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소성왕이 이를 불편해 하면서 즉위 1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대신들과의 회의에서 왕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크게 잔치를 벌리자는 언승의 주장과 조용하게 치루자는 소성왕이 크게 대립했다.



대신들의 회의에서 결정을 못 내리고, 형제들이 모여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미 술이 어느 정도 취한 상태였던 언승과 형제들은 감정이 상해 과격해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언승이 내리친 주먹에 탁자가 갈라지면서 엎질러진 술병이 깨어졌고, 밀고 당기던 상황에서 소성왕이 넘어지면서 깨어진 술병 조각이 후두부에 박혀 죽음을 맞고 말았다.



언승은 수종, 충공 등의 동생들과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

왕이 낙상해 사망한 것으로 발표하고, 서둘러 조카 준옹을 40대 애장왕으로 옹립했다.



13세에 아무것도 모르고 왕위에 오른 애장왕은 숙부 언승의 섭정에 꼭두각시 왕노릇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애장왕이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배경에 의심을 품게 됐다.

애장왕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꿈꾸면서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언승은 조카의 행동이 생각과는 다르게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하자 그의 주변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두고 드디어 애장왕의 꿍꿍이를 알아내고 말았다.

언승은 다시 동생 수종과 충공을 불러 모의를 했다. 애장왕은 아버지의 복수는 시작도 하지못하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야 했다.

신라 최초의 근친간 살육전으로 인한 왕위찬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본격적인 신라 멸망의 단초가 여기라는 이야기는 이어지는 왕위쟁탈 전쟁사로 증명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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