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문화재…안동 송은정

발행일 2020-11-10 19:30:5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2004년 지정된 경북 문화재 제473호, 경북 안동시 아랫태장길 43-13에 위치

조선 중기 문관이었던 송형구가 관직 물러나 친목 도모 및 학문 연구 목적 건립

소나무 2그루 사이 한 폭의 그림같은 정자, 아름다운 풍경과 운치 느껴지는 곳

송은정은 조선시대 사근도찰방 등의 관직을 지낸 송은 송형구가 1664년(현종 5) 관직에서 물러난 후, 학문 연마와 향촌 사림과의 교유를 목적으로 마을 뒤 야산을 절토한 경사면에 남향하여 건립한 정자다.


가을의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초겨울이 다가오는 가운데 산은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었고, 가을의 만연한 기운을 뽐내기 바쁘다.

바쁜 일상 속 가을의 막바지를 느끼고, 코로나19로 인한 잠깐의 휴식을 취할 겸 안동을 방문했다.

대구에서 안동으로 향하는 긴 도로에서는 일상 속 잠깐의 휴식을 보상해주듯 산과 밭 곳곳에서 여유로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줬다.

산에는 알록달록한 단풍이 우거졌고 떨어진 낙엽들은 바람에 흩날렸다.

가을 냄새도 물씬 났다.

따스한 햇볕 아래 올라오는 은은하고 포근한 나무 냄새와 흙과 풀 향은 바쁜 일상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세계문화유산의 도시라는 명칭에 걸맞게 안동은 옛날 옛것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운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휴식터와 같은 곳이었다.

과거와 미래가 함께 한 매력적인 관광자원이 무궁무진하다. 안동에는 관광지인 하회마을과 월영교, 도산서원 등이 있다.

자주 접할 수 없지만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문화재들도 넘쳐났다.

소박하지만 긴 세월로 인해 고풍스런 멋을 풍기고 있었다.

안동에 들어서자마자 안동만의 예스러움과 고즈넉한 정자, 가옥들이 눈에 들어왔다.

큰 도로에서 벗어나 20분가량 좁고 굽은 골목을 지났다.

안동 ‘송은정’이라는 작고 아담한 정자를 만날 수 있었다.

송은정은 온돌방과 마루, 툇마루로 구성된 정면 2칸·측면 1.5칸의 팔작지붕이다.


◆한 폭의 그림, ‘송은정’

송은정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솟아 있는 정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경북 안동시 아랫태장길 43-13에 있다.

봉정사 삼거리인 교차로를 지나 김태사묘 맞은편 좁은 길로 들어가면 산 중턱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송은정이 위치한 마을은 아주 한적하고 고요한 작은 동네다.

오후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동네는 조용했고, 지나가는 주민 1~2명만 드문드문 있었다.

인근에는 태장1동 노인정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다본 정자는 산과 어우러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와 그림 같은 장면을 눈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송은정을 더욱 가까이서 보기위해 다가갔다.

아주 큰 밭을 지나가야했다. 작은 차가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골목이었다.

골목을 지난 뒤에는 사람이 살지만 아주 오래된 흔적이 느껴지는 집 5채가량이 눈에 띄었다.

좁은 길이었지만 정자 앞에는 다행히도 널찍한 주차공간이 있었다.

정자를 더욱 가까이서 보려면 가파른 돌과 흙 길을 밟고 올라서야 했다.

정자는 작았지만,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완연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억새풀과 나무 등이 어우러져 남다른 기운을 자랑했다.

송은정 현판.


◆경북 문화재 제473호

송은정은 2004년 12월6일 지정된 경북 문화재자료 제473호다.

송은정의 역사는 아주 옛날인 조선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은 송형구(1598~1675)가 관직에서 은퇴한 현종 5년 1664년에 학문 연마와 향촌 사림과의 가까운 왕래를 목적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이송천변에 있었다.

송형구의 후손 송인명이 조상을 추모하고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1933년 태장리로 옮겨왔다.

송은정은 야산 기슭 중턱에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해 있다.

후대에 훼손됐지만 일제 강점기의 건축양식으로 새로 건립됐다.

이곳은 아담한 들판을 건너 태계가 흘러 선비들이 은거하기에는 좋은 자리라고 불린다.

조상의 깊은 뜻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서였을까.

송은정 아래에는 양주 송씨 후손들이 오래전부터 지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정자 마루 윗벽에는 향촌사람들의 글귀가 적힌 현판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송형구, 관직에서 이름난 문관

송형구는 조선 중기 문관이다.

본관은 양주, 자는 태이, 호 송은이며 안동 출신이다.

1642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했고 같은 해 식년시 진사에 합격해 관직은 관상감직장 찰방 등을 역임했다.

그는 1660년 진사 시설부터 역서에 관심이 깊었다.

원나라 허형이 만든 대통력과 명나라 때 독일 선교사 아담 샬의 시헌력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시헌력이 1644년 조선에 전해진 후 1653년부터 널리 사용됐다.

송형구는 평소 시헌력에 비해 대통력이 더욱 정확하다고 생각해 당시 대통력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는 방도를 찾아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1661년 전관상감직장으로서 음력과 양력이 더해져 24절기에 맞추어 제정된 시헌력을 폐지하고, 기존에 사용하던 음력 대통력을 사용할 것을 청했다.

하지만 관상감에서 일식과 월식을 통해 역수의 차이를 조사한 결과 대통력이 시헌력에 비해 오차가 크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69년 새로 만들어진 달력의 윤달 계산에 오류가 있음을 상소해 시헌력의 오차를 관상감에게 조사하게 했으나 윤달 계산에 오류가 없음이 확인됐다고 한다.

1664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송형구는 고향인 안동의 송천읍으로 내려갔지만 학문을 멀리하지 않았다.

지역 사림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학문을 연구할 목적으로 송은정을 세웠다.

송은정 현판.


◆조상의 지혜 엿보여

송은정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1명이 살 정도의 아주 작고 소박한 정자다. 온돌방 1개와 마루 1개 및 툇마루로 구성돼있다.

건물 좌측에 온돌방, 우측에 마루방을 들였는데 앞쪽은 반 칸의 퇴칸을 두고 퇴주 앞으로 2자 정도 마루를 더 확장시켜 계자난간을 세웠다.

문이 잠겨있지 않아 방안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오래된 기와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이 지낼 수 있을 정도의 비교적 잘 정돈돼있고, 깨끗한 편이었다.

정자 안 마루와 온돌방 사이에도 문이 달려있는데 아마도 겨울철 온돌방에서 지내며 추위를 대비하기 위한 것 같았다.

또 남향으로 마루쪽 큰문을 통해서는 해가 잘 들어와 여름철에는 문을 열어놓고, 마을을 내려다보며 사색하기 좋을 것 같았다.

건물은 경사면에 비스듬히 지어져있어 하부에 시멘트로 기둥이 만들어져 있었다. 정면은 화강석 주초를 놓고 위에 4각의 누하주를 세웠다.

자세히 건물 안을 들여다보면 거실 위에는 향촌 사림들의 시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자로 돼 조금은 보기 어렵겠다. 하지만 학문에 조예가 깊던 조상의 깊은 뜻을 기리기 위한 가문의 남다른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는 송은정상량문의 기문과 송은정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송은정기의 기문이라고 한다.

한글로 쓰인 송은정 약사의 편액도 볼 수 있다.

바로 앞에는 마치 정자를 지키고 있는 듯 한 아주 큰 소나무 2그루가 서있었다. 늠름한 자태를 자랑했다.

소나무 2그루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은 따스한 빛이 되기도 했고, 그늘이 되기도 해 운치를 더했다.

운이 좋게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다볼 수 있었다. 정자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운치는 장관이었다.

가까이 있는 자연과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도로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선조가 남기고 간 유물을 돌볼 수 있는 후손들의 마음은 어떨까.

정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거 조상이 했던 생각과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당시 선조의 경험과 지혜 등을 느낄 수 있었고, 잠깐의 휴식과 함께 현대사회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힐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 안동 송은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

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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