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시 한편

발행일 2020-10-21 15:43:1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오월의 바람 外

가을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사춘기 시절 가슴 속에 품었던 시인의 꿈을 이 가을 다시 한 번 살포시 끄집어내 보자. 어느 결에 우리 곁에 온 이 가을이 더 멀리 떠나기 전에 모두가 계절을 노래하는 시인이 돼보자.

회색 도시
◇회색도시/박주엽 지음/그루/168쪽/1만3천 원

말하지 않는다고 흐르는 물이 멈추지 않는다/말 많은 세상 말 주워 담으려고 묵언 중이다/숲 속 새는 무슨 말을 하는지 주워 담지 못하겠다/입 꾹 다물고 즐거운 것과 꼭 남길 말만 눈에 담으니/언사안정이 묵언을 불러 박수로 화답 한다.

‘한맥문학’ 시부문 신인상, ‘문학예술’ 시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박주엽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회색도시’가 도서출판 그루에서 출간됐다.

작가가 8년 동안 짬짬이 써 놓은 시를 묶어 출간한 시집이다. 젊은 시절 하나둘 적어둔 낙서장 같은 글들을 정리해 펴낸 생애 첫 시집 ‘그림자’를 시작으로 ‘넝쿨’, ‘시들은 장미에 짙은 향기가 난다’ 등을 발표했다.

시인은 “문학이 주는 의미는 세월을 비켜가지 않는다. 10년 전이고 20년 전이고 하물며 50년 전까지 들추게 하는 그것이 문학이 주는 힘이면서 산물”이라고 이야기 한다.

창작시로 인권을 대변하고, 후세대를 위한 열린 세상의 작은 디딤돌 역할을 하고 싶다는 시인은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인권시를 개척한 인물이다. 대구 북구문협 창립멤버이기도 한 시인은 이번 시집 출간과정에 커다란 고통과 슬픔이 배여 있다고 소개했다.

이번 시집 ‘회색 도시’에는 가족 간의 꿈과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다. 비뚤어진 세상, 잘못된 모순의 사회상을 바로잡고자 한 시인의 소망이 가득 담겨 있다. 또 현상을 중심에 두고 세상 부조리를 눈여겨보며, 현실적 거리 감각을 유지하면서 유토피아를 찾아간다.

그의 시 세계는 일상어의 어법과 호흡을 그대로 구사해 현실과의 괴리를 좁히면서 사실 속의 신선한 생동감을 반영해 냈다는 평이다. 시인의 자아 세계가 다양한 어조의 변화와 더불어 긴밀하게 어우러진다.

시인은 “시를 이야기하며서 기본 중심의 감각과 감성이 어우러진 객관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주관적이어야 하고, 기교(미사여구)가 들어가서도, 리얼리티를 상실해서도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오월의 바람
◇오월의 바람/곽도경 지음/두엄/125쪽/1만2천 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주관하는 ‘2020년 출판콘텐츠 창작지원 사업’에 선정된 곽도경 시인의 시화집 ‘오월의 바람’이 도서출판 두엄에서 발간됐다.

‘오월의 바람’은 시인이 직접 그린 그림과 남편 김상곤씨의 사진이 함께 들어있어 읽을거리 볼거리를 함께 충족시켜 주는 시화집이다.

시인의 시는 대체로 일상과 가족 그리고 풍경 등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여 진 시로 문단의 주류를 형성해 온 추상적 사고와 과도한 지적 경쟁의 사유를 벗어난 편안하고 따스한 시어들로 구성돼 있다.

시집 속에 있는 그림 또한 시인의 소녀 시절 꿈을 엿보는 듯 추상적 풍경들로 이루어져 있어 독자들을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시집 표지글을 장식한 김경호 시인은 “곽도경 시인의 시편에서는 ‘알을 품은 어미새’처럼 섬세한 시선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품어내는 ‘눈물 나는 봄날’ 같은 시심이 느껴진다. 이번 시집 속에 그녀가 만들어 놓은 시의 실핏줄을 따라가다 보면 아픈 이웃들의 마음마저 꿰매주는 ‘신기료장수’처럼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싯구들과 조우하게 되고 위로받게 될 것이다”고 했다.

지난 봄 코로나의 공포가 대구·경북을 휩쓸고 지나갈 무렵 시인은 코로나를 기록한 대구의 시인들이 출간한 시집 ‘아침이 오면 불빛은 어디로 가는걸까’에도 시를 소개한 바 있다.

대구에서 출생한 시인은 ‘시선’을 통해 문단에 선을 보였다. 시집으로 ‘풍금이 있는 풍경’을 발간하기도 했으며 화가이기도 한 그는 청도 북대암에서 ‘절간이야기’라는 시화전을 가진 바 있다. 또 지난해에는 ‘인연의 고리’라는 인물화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2018년 고령문학상, 2019년 제5회 누리달 공모전 대상, 2020년 낙동예술대전 서양화부분 특선 등 여러 수상 경력이 있으며 현재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 보급운동 문학회 ‘시하늘’의 운영자 중 한 명으로 활동 중이다.

끝은 끝으로 이어진
◇끝은 끝으로 이어진/박승진 지음/창비시선/116쪽/9천 원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삶의 근원적 슬픔과 ‘목소리 없는 타자들’의 삶을 진솔한 언어로 기록해온 박승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끝은 끝으로 이어진’이 출간됐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문단에 나온 시인은 묵묵하고 결연한 걸음으로 슬픔의 정서를 주조음으로 한 독특한 시적 문법을 구사하며 자신만의 시 세계를 다져왔다.

2011년 등단 4년 만에 첫 시집 ‘지붕의 등뼈’를 냈고, 2016년 ‘제2회 박영근작품상’에 이어 두 번째 시집 ‘슬픔을 말리다’로 제19회 가톨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실패와 소외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존재들과 자연에 바치는 송가다.

시인은 탁월한 묘사력과 섬세한 언어로 삶의 진솔한 풍경을 담아내며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감동적인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삶에 대한 성찰과 시적 사유가 돋보이는 시편들이 묵직한 울림을 자아내며 가슴을 적신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늘 측은지심이 담겨 있는 시인의 시에는 슬픔과 허무가 가득하다. 사는 게 꼭 ‘거세당한 비육우 같다’는 삶의 비애가 잔잔하게 흐른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을 보겠다’던 초기의 애잔한 마음이 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사무치는 듯하다.

시인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채 몸은 있어도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유령들과 같은 존재들에게 주목한다. 특히 삶의 종막에 이르거나 황폐해진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힌 채 고독하게 죽어가는 소외된 ‘늙은 존재들’의 일생을 사뭇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삶의 진실한 의미를 되새긴다.

한때 혁명을 꿈꾸기도 했던 시인은 이 세계가 살아 있는 고통의 형식이라고 여긴다. 시인이 살아가는 ‘지금-여기’는 ‘바닥’이고 ‘허공’이다. 시인에게 삶은 아무리 사력을 다해도 오르지 못하고 늘 문 앞에서 실패하고 마는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라고 이야기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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