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율사와 의상법사 중국도 인정||신라 화엄종 정착시키고 후학 양성

▲ 통도사를 대표하는 중심건물로 국보 제290호로 지정된 목조건물 대웅전과 금강계단. 대웅전 뒤에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어 대웅전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있다. 신라시대 646년에 처음 지은 이후 수차례 고쳐 지었다.
▲ 통도사를 대표하는 중심건물로 국보 제290호로 지정된 목조건물 대웅전과 금강계단. 대웅전 뒤에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어 대웅전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있다. 신라시대 646년에 처음 지은 이후 수차례 고쳐 지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은 중국에서 여러 차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져온 내용이 기록돼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일은 요즘도 여러 사찰에서 귀중한 행사로 가끔 열리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인도, 태국, 필리핀 등의 여러 나라의 상당히 많은 사찰에서 모시고 있다.



과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얼마나 많아서 이렇게 많은 사찰에서 모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황룡사와 영묘사 등에서는 장육존상을 모셨던 이유에 대해 실물 크기로 조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부처님의 신체가 그렇게 장대했기 때문에 사리 또한 그만큼 많은 양이 출토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사찰에서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적들이 많이 발생한다.

부처님의 영험한 힘으로 해석하며 믿음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러 차례 가져온 사리에 대한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본다.





▲ 통도사의 중심건물은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남쪽에는 금강계단,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금강계단이라는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 통도사의 중심건물은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남쪽에는 금강계단,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금강계단이라는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삼국유사: 여러 차례 가져온 사리

국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진흥왕 때인 태청 3년은 기사년(549)인데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 몇 낱을 가져왔다. 선덕왕 때인 정관 17년은 계묘년(643)인데 자장법사가 부처의 두개골, 이빨, 사리 100과와 부처가 입었던 붉은 비단에 금으로 무늬를 낸 가사 한 벌을 가져왔다. 사리는 셋으로 나눠 일부는 황룡사 탑에, 일부는 대화탑에, 또 일부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뒀다. 계단은 두 층인데 위층 가운데에 가마솥을 덮어놓은 것 같은 돌 뚜껑이 놓여 있었다.’



반면 세상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옛날 우리 고려조에 들어와 두 사람의 염사가 차례대로 와서 단에 예불을 드리고 돌솥을 들어 보았다. 앞사람은 돌 상자 안에 구렁이가 있는 것을, 뒷사람은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부터는 감히 열어보지 못했다.’



상장군 김이생과 시랑 유석이 고종 임금 때에 명령을 받아 강동을 지휘했는데 부절을 가지고 절에 이르러 돌을 들어내고 예불하려 했다.

절의 스님이 어렵다고 했으나 두 사람은 군사를 시켜 굳이 들어냈다.





▲ 석가모니의 옷과 그릇을 받들어 두는 곳으로 의발탑이라고도 부르는 봉발탑. 보물 제4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화전 앞에 서 있다.
▲ 석가모니의 옷과 그릇을 받들어 두는 곳으로 의발탑이라고도 부르는 봉발탑. 보물 제4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화전 앞에 서 있다.


안에는 돌로 된 작은 상자가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유리통이 담겨있는데 통 안에는 사리가 다만 네 낱이 있어 돌려보며 경배했다.

통에는 조금 갈라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가지고 있던 수정 상자를 시주하고 함께 보관했다.



옛 기록에서 ‘100과를 세 곳에 나누어 간직했다’고 했으나 이제 겨우 4과뿐이다.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이 사람에 따라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 했으니 괴상한 일이 아니다.



진신의 네과 사리 외에는 변신 사리여서 모래알처럼 부서졌지만, 솥 밖으로 나오면 특이한 향이 가득 차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이것은 말년의 한 가지 기이한 일이다.



당나라 대중 5년은 신미년(851)인데 중국에 신년인사를 갔던 원홍이 부처의 어금니를 가져왔다.

뒷날 당나라 동광 원년은 계미년(923)인데 우리 고려 태조가 즉위한 지 6년, 중국에 신년인사를 간 윤질이 5백 나한상을 가지고 왔다.

현재는 북숭산 신광사에 있다. 송나라 선화 원년은 기묘년(1119)인데 중국에 공물을 드리러 간 정극영, 이지미 등이 부처의 어금니를 가져왔다.

지금 내전에 두고 모시는 바로 그것이다.





▲ 통일신라시대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보물 제1471호로 관리되고 있다. 석탑의 기단에서 백자, 소형 금동불상 2구,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됐다.
▲ 통일신라시대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보물 제1471호로 관리되고 있다. 석탑의 기단에서 백자, 소형 금동불상 2구,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됐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이 이렇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 스님이 계신 곳에 이르렀다.

가까운 곳에 선율 스님이 있었는데 늘 하늘에서 공양을 해 주었다.

재를 올릴 때면 하늘에 있는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주는 것이다.

하루는 선율이 의상을 초청해 함께 재를 올렸다.

의상이 앉아 오래 지났는데 하늘에서 줄 때가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

그래서 의상은 바리때가 빈 채 돌아왔다.

그제야 천사가 이르러 선율이 물었다.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늦었습니까?”

“온 골짜기에 신병이 서서 막고 있으니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이에 선율은 의상에게 신의 호위가 있음을 알았고, 그 도가 뛰어난 것에 감복했다.

그래서 바리때를 두고서 다음날 지엄과 의상 두 스님을 불러 그 까닭을 설명했다.

의상이 조용히 선율에게 “스님은 이미 하늘님이 경배하는 바를 입었습니다. 제석궁에는 부처님의 마흔 개 치아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 세상에 내려 보내 복을 받게 한다면 어떻습니까?”고 말했다.





▲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부르는 불이문. 경남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부르는 불이문. 경남유형문화재 제252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뒷날 선율은 천사에게 그 뜻을 하느님께 전하도록 했다.

하늘님은 7일간만 보내준다 하니, 의상이 경배를 드리고 궁궐로 들여보내 모셨다.



진흥왕 때인 천가 6년은 을유년(565)인데 진나라 사신 유사와 명관 스님이 불교의 온갖 경론 1천700여 권을 실어 보내왔다.

정관 17년(643), 자장법사가 삼장 400여 상자를 싣고와서 통도사에 모셨다.

흥덕왕 때인 태화 원년은 정미년(827)인데 공부하러 갔던 고구려의 승려 구덕이 불경 약간 상자를 가져오니 왕과 여러 절의 승려들이 흥륜사 앞길에 나가 맞아들였다.



대중 5년(851)에 신년인사를 갔던 사신 원홍이 두루마리 불경을 약간 가져왔다.

여기 기록된 의상전을 보면 영휘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을 찾아뵈었다라고 말한다.







▲ 경내에 불을 밝히는 석등으로 오래 전에 제작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석등은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됐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팔각의 하대석을 두고 팔각 기둥을 올렸다.
▲ 경내에 불을 밝히는 석등으로 오래 전에 제작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석등은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됐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팔각의 하대석을 두고 팔각 기둥을 올렸다.


그러나 부석사의 본비에는 ‘의상은 무덕 8년(625)에 태어나 어려서 출가했다.

영휘 원년은 경술년(650)인데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가고자 고구려에 이르렀지만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

용삭 원년은 신유년(661)인데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에 배웠다.

총장 원년(668)에 지엄이 돌아가시자 함형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왔다.

‘장안 2년 임인년(702)에 돌아가시니 나이가 78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엄과 선율스님이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에 있던 부처의 어금니를 청한 일은 신유년(661)에서 무진년(668)까지가 아닌가 싶다.



우리 고려조에서 고종이 강화도로 들어간 임진년에 천궁의 기한인 7일에 찼다고 의심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도리천에서의 하루 밤낮은 세상에서 100년이다. 의상이 처음 당나라에 들어간 신유년부터 계산해 고종 임진년까지는 693년이다.

경자년(1240)까지 비로소 만 700년이 돼 7일의 기한이 찬다.



▲ 경남문화재 제197호로 등록된 통도사의 약사전. 공민왕 때 성곡대사가 처음 지었지만 18세기 초에 다시 수리했다.
▲ 경남문화재 제197호로 등록된 통도사의 약사전. 공민왕 때 성곡대사가 처음 지었지만 18세기 초에 다시 수리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자장율사와 의상법사

신라시대 진골 출신으로 관직에 있었던 무림은 아들이 없었다.

부처님에게 축원해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화엄경을 창안하고, 신라의 대국통으로 분황사와 황룡사 주지를 역임했던 자장율사다.



자장율사는 어버이가 이승을 하직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처자식을 떠나 깊은 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매진했다.

왕이 재상으로 기용하려 했지만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 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응하지 않았다.



이어 자장은 중국으로 들어가 종남산에서 수도하며 장안까지 높은 덕이 알려졌다.

이후 당 태종이 장안의 승광별원에 머물게 할 정도로 두터운 예우를 받는 입장이 됐다.



자장은 장안에 머무르며 당 태종의 정치적 이념을 설정하는 절대적 위치에 있으면서 신라의 안녕을 위한 복안을 마련했다.

후일 의상법사가 장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예언하며 그로부터 정치의 향방을 묻는다면 태평할 것이라 일러뒀다.

당 태종은 자장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하고 모두 그의 말에 따르도록 했다.







▲ 통도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랜 역사만큼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삼국유사 등에서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사찰 입구의 계곡을 지나는 다리 전경.
▲ 통도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랜 역사만큼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삼국유사 등에서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는 유서깊은 사찰이다. 사찰 입구의 계곡을 지나는 다리 전경.






선덕여왕이 나라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 인재가 절실함을 느끼고 자장을 신라로 돌려보내 줄 것을 당 태종에게 청해 드디어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게 했다.

자장은 분황사와 황룡사에 머물면서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워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의상은 1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그의 나이 서른 중반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 지엄을 만나 화엄사상에 대해 깊이 공부해 훗날 신라에서 자장의 뒤를 이어 화엄종을 더욱 발전시켰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화엄을 공부하고 장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태종은 이미 사망하고, 고종이 뒤를 이었다.

태종과 자장의 약속은 고종의 대에는 이미 잊혀지고 파기된 후였다.

의상은 고종이 50만 대군을 파견해 신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히 신라로 돌아와 문무왕에게 대비책을 마련하게 했다.

의상은 부석사, 낙산사 등을 창건하고 3천여 명의 제자를 나라의 동량으로 키웠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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