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든 때에/ 장정옥

발행일 2020-10-14 10:07:3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금자의 운수 좋은 날~

…금자는 산에 갔다가 젖은 나뭇잎을 밟고 미끄러졌다. 발목을 삐고 인대가 늘어진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장날이라 바로 장터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만원이었다. 발목이 욱신거렸으나 출구 옆 기둥을 잡고 버텼다. 과속방지턱에서 버스가 덜컹거렸다. 금자는 발목을 잡고 주저앉았다. 기사는 금자를 업고 병원으로 옮겼다. 인대가 늘어나고 복숭아 뼈에 염증이 생겨 수술을 하고 깁스를 해야 한단다. 보험을 들어놓은 터라 바로 입원했다. 과속방지턱을 넘다 입원한 건 처음이라며 다른 데서 다쳐놓고 덤터기 씌우면 구속이라고 기사가 으름장을 놓았다. 치료비를 줄 테니 합의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현금 70을 달라고 했다. 다음날 기사가 합의금을 들고 왔다. 금자는 보험회사에 사고를 접수시켜달라고 했다. 기사가 난색을 표하자 금자는 합의금을 200으로 올렸다. 기사가 화를 냈다. 친구 춘자의 얘기를 교훈삼아 끝까지 버티기로 했다. 사흘 후 기사가 70만 원과 합의서를 내밀었다. 일단 돈을 받았다. 양심의 가책이 되긴 했다. 금자는 두 번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을 해코지한 적은 없었다. 때마침 돈을 빌려달라는 아들의 전화가 왔지만 거절했다. 사흘 후 기사가 70을 더 주면서 통사정했다. 귀찮아서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합의서를 받아 쥔 기사는 악담을 하며 삿대질을 했다. 다른 환자들의 눈총도 사나웠다. 늘그막에 믿을 건 돈 뿐이다. 적당히 속고 속이며 사는 게 인생이다. 기사가 고맙고 불쌍하긴 하다. 금자는 병실이 불편해서 퇴원했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집은 썰렁했다. 아들 전화가 왔다. 아내와 장모가 유럽여행 간다며 아이들을 봐달란다. 쫓겨난 계모에게 염치없는 청이었지만 그리 불쾌하진 않았다. 봐주기로 했다. 귀여운 손주들에게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며느리와 안사돈이 오는 날, 집으로 돌아왔다. 금자는 남편과 사후이혼을 마치고 남편의 무덤을 찾아 모든 관계가 끝났음을 알렸다. 금자는 순댓집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오랜만에 과로해선지 퇴근 후 가슴이 아팠다. 가슴 통증이 풀리지 않아 다음날 병원에 갔다. 의사는 심근경색이라며 당장 입원하라고 강권했다. 가슴이 철렁했으나 의사의 권유를 물리쳤다. 다음날엔 몸이 개운해서 식당에 정상 출근했다. 퇴근 후 아이들이 할머니를 찾는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이들이 반겨주어 기분이 좋았다. 집에 돌아와 화장실에 가다가 금자는 정신 줄을 놓았다. 금자는 가고 벌레가 버글거리는 시신만 남았다.…

인생이 허망하다고 입에 달고 살면서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남에겐 다 내려놓아야 행복하다고 설법해놓고 자신은 잇속을 챙긴다. 인생무상은 무력한 자신을 위로하는 말로 전용된다. 용케 내려놓을 땐 불가능하거나 힘이 달려 포기할 경우다. 이솝의 ‘신포도 우화’는 그래서 정곡을 찌른다. 사는 게 별 거 아니라면서 기회만 오면 별 거 있는 것처럼 버둥거린다. 잘 되면 자기 탓, 잘못되면 남 탓이다. 금자의 허무한 삶도 예외가 아니다. 예순 중반의 혼자 사는 금자는 돈 쓸 데가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늘 돈 되는 일을 찾아 헤맨다. 합의금을 많이 받아내려고 거짓말을 하고 불쌍한 기사에게 덤터기를 씌운다. 죄의식도 갖지 않고 다 그렇게 산다고 자기 합리화한다. 심근경색이라며 입원하라는 의사를 돈만 밝히는 사기꾼 취급하며 거부한다. 지나온 삶이 고단하고 신산한 건 주변사람 탓이거나 불운한 팔자 탓이다. 본인은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왔다. 공허한 삶의 패러독스가 뒤통수를 친다. 오철환(문인)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