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각사/ 김용주

발행일 2020-09-29 08:58:5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세상 힘든 길이 마음의 짐 지는 걸까// 용서하고 잊기 위해 절집 찾은 어느 하루// 바람이 등 뒤로 와서/ 내 어깨를 다독인다// 법당 앞 배롱나무 자다 깨다 듣는 설법// 울울한 시간 두고 써 내려간 이치대로// 가슴에 불씨 하나를/ 촛불처럼 밝힌다

시조집 「본다, 물끄러미」 (일일사, 2018)

김용주 시인은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해 2009년 ‘시조세계’와 ‘대구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이태 전 점자 겸용 시조집 「본다, 물끄러미」를 펴냈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즈음 ‘인각사’를 읽는 마음이 별다르다. 인각사는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산에 있다. 삼국시대 신라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다.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기도 하다. 절 입구에 깎아지른 바위가 있다.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지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일연선사가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했다. 절 앞의 길은 삼국유사로다.

화자는 세상 힘든 길이 마음의 짐 지는 걸까, 라고 말하면서 용서하고 잊기 위해 절집을 찾은 어느 하루 바람이 등 뒤로 와서 어깨를 다독이는 것을 느낀다. 인각사로 가는 길은 구비길이어서 마음의 짐을 부려놓을 만하다. 요즘은 길이 잘 닦여서 그런 느낌이 덜 들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주변의 풍광과 더불어 요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어서 시름을 덜어내기 좋았던 기억이 있다.

등 뒤로 와서 어깨를 다독이는 바람도 학소대를 휘돌아 냇물을 건너오는 바람이어서 위로를 안겨주기에 안성맞춤이다. 절 마당을 다니다가 보면 삼국유사를 집필하던 때의 일연서사의 장삼자락이 어딘가에서 펄럭이는 듯한 생각에 젖어들 때도 있다. 단순히 유서가 깊다고만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기운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아무래도 그것은 삼국유사와 관련이 깊다. 문학적 상상력의 보고가 탄생한 곳이기에.

법당 앞 배롱나무는 자다 깨다 하면서 설법을 듣는다. 그래서 화자는 울울한 시간 두고 써 내려간 이치대로 가슴에 불씨 하나를 촛불처럼 밝힌다. 그 불씨 그 촛불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고 타오를 것이다. 번뇌를 조금씩 사를 불씨, 그것은 곧 화자의 삶을 추동하는 힘이다.

그는 또 ‘능소화가 있는 풍경’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일체를 꿈꾸는 노래를 부른다. 거꾸로 벽을 타고 누구를 기다리는가, 하고 질문하면서 한여름 어린 손길 억척스런 그리움이 오늘은 목 길게 빼고 긴 나팔을 불고 있는 것을 예의주시한다. 그러면서 그 무슨 할 말 많아 송이송이 피어났다가 얼마 있지 않아 송이채 떨어지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유정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화자는 이 생을 지나가는 일마저도 너를 닮고 싶구나, 라고 읊조린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여름 날에 활짝 핀 능소화를 바라보게 되면 어떤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기에 화가는 그림을, 시인은 내적 충동으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언가 치열하게 형용하고 싶다는 뜨거운 느낌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운 꽃이 능소화이기 때문이다.

능소화가 피었다가 진 곳에 잘 물든 감나무 잎이 떨어져 뒹군다. 문득 어느 해 가을 인각사 가는 길 양편에 줄지어 서서 바람에 흔들리던 코스모스가 생각난다. 한가위를 맞아 그 코스모스 꽃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보면 차디찬 가을 물이 유유히 흐르는 학소대에 발길이 닿게 될 것이다. 그때 인각사, 라고 입속으로 고요히 절 이름을 한번 불러보라.

기나긴 역사 속의 유한한 존재인 자신을 더욱 긍휼히 여기게 되리라.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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