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에도/ 그 존재가 확실한 용도의/ 돼지나 소 막창같이 질긴,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음 앞에서/ 멈추고 멈추어 온 나는 지금도 멈춘다/ 저 붉은 신호등의 붉은색은 다만/ 나를 잠깐 멈추게 하는 가식인가/ 내가 진짜 멈추는 이유는/ 신호등의 저 붉은색이/ 질서를 아름답게 만든다는 질긴, 환상 때문인가

「대구문협대표작선집Ⅰ」 (2013)

신호는 일정한 부호, 표지, 소리, 몸짓 따위로 특정한 내용이나 정보를 전달하거나 지시를 할 수 있는 전달매체 또는 그렇게 하는 데 사용하는 행동이나 부호이다. 신호등은 차량이나 사람에게 신호를 알려주는 장치로 보통 교통신호등을 말한다. 신호등 색깔의 의미는 일정한 행동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전 세계적으로 붉은색은 정지, 노란색은 신호 변경 예고, 녹색 또는 파란색은 통과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세부적인 내용은 각 나라별로 조금 다르지만 붉은색은 정지하라는 뜻에 한정된다.

돼지나 소의 막창은 죽은 후에 전골로 요리되거나 불에 구워져서 술안주가 된다. 그 용도가 사후까지 끈질기게 따라오고 그 막창의 질긴 식감이 질기도록 따라붙는다. 신호등의 붉은색도 돼지나 소의 막창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태어나기도 전에 붉은색 신호등에 멈춘 것이 태어난 후에도 계속 멈춘다. 앞으로도 붉은색 신호등 앞에 끈질기게 멈춰 설 것이 확실하다. 아마 죽고 난 후에도 붉은색을 보면 멈추어 설 것 같다.

그렇다면 붉은색 신호등의 원 개념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사람들을 잠깐 멈추게 하는 전달개념을 단순히 원 개념으로 받아들이긴 곤란하다. 과거로부터 그렇게 해왔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길들여진 대로 붉은색에 본능적으로 정지하는 것일까. 끈질기게 되풀이된 학습으로 인해 형성된 세뇌와 관성에 따라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일종의 조건반사일 수 있다. 허나 붉은색이 잠재적 위험을 보여주기 위한 가식적인 신호에 지나지 않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만물의 영장 인간에 대한 비하이자 모독이다.

붉은색에 말없이 정지하는 원 개념은 아름다운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써 약속을 지키고 질서를 존중함으로써 공동체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시스템에 동참한 결과다. 질긴 습관과 무심한 가식 그리고 질긴 환상으로 이어지는 무감각한 인간군상의 고루한 삶이 눈을 가리는 장막이 되고 숨을 틀어막는 장애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자유로운 영혼은 반발심을 갖기도 한다. 반사적으로 자동화된 의식구조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작은 파격과 일시적 일탈의 유혹은 인지상정이다.

빨강은 흥분해 피를 들끓게 함으로써 노동자를 선동하는 색깔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완수하는 데 최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빨강은 공산주의의 상징색깔로 채택되었고 적색깃발은 공산국가 국기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공산주의자를 빨갱이로 부르게 된 연유다. 6·25를 겪으면서 반공은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가치가 되었고 빨갱이는 해충보다 더 해로운 존재로 박멸대상이었다. 빨갱이는 늑대같이 험악하게 생긴 시뻘건 얼굴에 머리에 뿔이 난 모습이었다. 빨강은 금기였지만 호기심에 찬 유혹이기도 했다. 신호등의 붉은색이 빨갱이를 은유한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빨갱이를 적대시하던 시대를 살아온 사람에게 붉은색은 정지하고 접근하지 말아야 하는 질긴 고정관념이었고 거부하고 배척해야 하는 조건반사였으니까. 오철환(문인)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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