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시대의 추석

발행일 2020-09-27 14:50:2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여명 속으로 차를 몰았다.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연장을 챙겨 선산으로 향했다. 들판은 누르스름하게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단풍도 어느새 울긋불긋 물이 들었다. 바이러스와 정신없이 싸우는 동안에도 자연은 인간들이 착실하게 추석을 맞이하라고 준비를 다 해주고 있나 보다.

몇 밤만 자고 나면 중추절이다. 떡방아 찧는 소리 속에 추석이 다가온다고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30여 년 전 내가 갓 결혼했을 때만 해도 집에서 송편을 빚었다. 그해 나온 햅쌀을 물에 불려 깨끗하게 씻어 건져 물기가 빠지면 떡 방앗간에 가지고 갔다. 그곳에서 하얀 쌀가루로 갈아 집으로 가져오면 숙모님들은 반죽해서 모두 둘러앉아 밤이 이슥할 때까지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저마다의 소원을 담아 예쁜 송편을 빚었었다. 햇과일과 햇곡식을 조상에게 바치며 정성껏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추석, 둥그런 보름달이 떠오르면 누구보다 먼저 그달을 보면서 가슴 속에 품었던 이루고 싶은 소원을 간절히 빌곤 했다. 어린 시절엔 무던히도 기다려지던 명절이었건만 세월이 무심하게 흐르면서 세태도 변해가고 또 그때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그에 대한 기대도 의미도 엷어져 간다.

송편을 잘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고 정성을 다하던 이들도, 솔향기가 솔솔 떡에서 나도록 넣어보자며 솔잎을 따오던 분들도 이제는 모두 저세상으로 가셨다. 양가 부모님 모두 안 계시는 추석 명절이라서 이번부터는 간편하게 지내기로 했다.

더구나 올해에는 코로나로 인해 다 함께 모이지 않으면 좋겠다는 정부 정책에 동참하는 의미에서라도 간략하게 보내면 어떨까 하는 안을 내게 됐다. 명절이 돼서야 서로 얼굴을 만나는 형제자매들이라 그래도 추석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벌초를 함께 하기로 했다. 조상님 산소를 살피고 단정하게 풀을 깎아 추석달이 떠오를 때 기분 좋게 지내시게 하면 후손들의 마음이 그래도 편하지 않겠는가.

벌초하는 날을 어렵사리 잡았다. 오고 가는 거리를 생각해 덜 밀릴 것으로 생각하는 날을 받아서 예초기 날을 갈고 낫을 찾고 갈퀴를 챙겨 산소로 향했다. 새벽의 도로는 어둑할 때부터 붐비기 시작이다. 너도나도 추석 전에 성묘하러 가는 모양이다. 길에서 둘러보니 도로 옆으로 늘어선 메타세쿼이아에도 갈색 빛이 내려오고 있다. 희뿌옇게 터오는 동녘 하늘에 새 떼들이 한가로이 무리 지어 날아가고 있다. 마치 조상의 흔적을 찾아 돌아보듯이.

풀이 수북하게 솟아오른 산소를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탄가스를 넣어 사용하는 예초기에 4개째 가스를 교환할 때쯤 서울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한 동서와 조카가 도착했다. 시누이도 정성스레 대게를 삶아왔다. 각자 정성껏 챙겨온 음식을 펴놓고 향을 피워 조상께 차례 인사를 올린다. 이번 추석은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덜 붐비는 시간에 벌초하는 시간에 벌초 겸 성묘 겸 모시게 됐다고 남편이 아뢰었다. 두 번 엎드려 절하고 술을 한 잔씩 모두 돌아가며 올린 후 음식을 나눠 먹으며 조상님들 편안히 지내시기를 기원했다.

명절은 늘 바쁘게 동동거리면서도 문득 멈춰서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깜빡 잊고 있었던 이들을 떠올리게 되지 않던가. 서로 서로 얼굴 마주하고 그동안 못다 한 정을 듬뿍 나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느 고향 마을에 붙어 있다던 문구에도 있지 않던가.

“불효자는 ‘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찾아 가 자칫 코로나라는 무서운 역병을 전해줄 수도 있으니 마음은 늘 가까이 있더라도 이번 추석만은 몸은 멀리해야 할 것 같다. 늘 자식들을 그리워할 부모님이지만, 어쩌겠는가. 멀리서 안부 전하며 그리움을 마음 밭에 묻어 둬야 하지 않겠는가.

하산하는 길가에 어디서 날아와 뿌리 내려 피어났을까. 가우라가 활짝 피어 바람에 살랑댄다. 논두렁에는 노랗게 피어난 커다란 돼지감자꽃이 큰 몸짓으로 흔들거린다. “나도 여기 있어요. 여기 서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지키고 있었다고요”라고 외치는 것 같다. 노란 꽃을 본 조카가 아는 꽃이 나왔다며 환하게 웃는다.

“제가 아는 유일한 꽃이에요. 저것은 바로바로 ‘코스모스’에요.”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살펴 가라고 손짓하는 듯한 묘소들을 뒤로하고 내려오며 거리두기 시대의 추석을 생각한다. 어쩌면 코로나 이후의 명절 풍경은 이렇게 변해갈지도 모르겠다고.

명절이 다가온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그리운 이들에게 따스한 안부를 전해보자. 얼굴 뵈러 가진 못하지만,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서 밀린 정 듬뿍 나눌 수 있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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