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알 틈서리로/ 주홍빛 배어들어// 차라리 푸른 자락/ 외로 앉은 가을 하늘// 기러기/ 울음소리도/ 된서리에 떨어진다// 굽으로 돌아가는/ 이어지는 강물 소리// 하얀 뿌리 내리다가/ 꽃대공만 섰는 노래// 들창문/ 고운 살결에/ 빛이 되어 반짝인다// 아직도 두고 보면/ 고향산 먼 나루터// 노 저을 외진 길이/ 가슴에 와 놓이는데// 속새풀/ 바람에 날려/ 늦가을을 흩는다

「대구시조 23호」(2019, 그루)

장식환 시인은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7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고 시조집으로 「연등 들고 서는 바다」 「그리움의 역설」 등을 펴냈다.

가을도 초입을 지난 지 오래고 눈앞이 곧 추석이다. 매미울음은 벌써 그쳤고 산과 들의 빛깔도 완연히 달라졌다. 황금들판을 바라보면서 풍요로움을 느낀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문득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먼 옛날의 고향집이 생각난다. 아, 또 다시 가을이구나, 가을이 깊어가고 있구나, 라면서 얼마간 쓸쓸함을 느낀다.

여기 가을을 맞은 이의 마음을 다독여줄 시가 있다. ‘고향 가을’이다. 마흔 해 전에 지면을 통해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석류알 틈서리로 주홍빛 배어들어 차라리 푸른 자락 외로 앉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데 기러기 울음소리도 된서리에 떨어진다. 고향 가을의 정취를 정감 있게 그리고 있다. 관찰에서 비롯된 섬세한 감각과 밀도 높은 서정성이 돋보인다. 이어서 화자는 굽으로 돌아가는 이어지는 강물 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또한 하얀 뿌리 내리다가 꽃대공만 섰는 노래가 들창문 고운 살결에 빛이 되어 반짝이는 것을 본다. 지극히 평화롭고 아늑한 정경이다. 향수에 깊이 젖어들게 한다.

고향산 먼 나루터에 이르면 노 저을 외진 길이 가슴에 와 놓이는 것을 느낀다. 아직은 갈 길이 멀고 아득하다. 그 외진 길이 눈앞에 있는데, 이따금 고향 마을이 떠올라 마음 속 깊이 쟁여둔 그리움을 자아올린다. 몸에서 떠날 수 없는, 영원히 몸과 함께 할 고향이기에 속새풀 바람에 날려 늦가을을 흩는 그 어느 가을날 고향 강둑을 찾았을 법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남은 길에 대한 벅찬 예감과 기대로 옷자락을 한없이 흩날렸을 것만 같다.

끝부분에 나오는 속새풀은 ‘고향 가을’의 대미를 장식하는 시어로서 묘한 울림을 준다. 속새는 식물체 모양이 말 꼬리를 닮았고, 조상으로 치면 양치식물들처럼 족보가 아주 빠른 선조들 식물에 속한다고 한다. 어둠침침한 숲속의 습지가 고향인 늘 푸른 여러해살이 풀이다. 이 풀이 결구에 놓임으로써 이 시편에 의미와 맛을 더하고 있다. 속새풀, 속새풀이라고 부르노라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깊어진다. 그것은 석류알, 주홍빛, 푸른 자락, 가을 하늘, 기러기 울음소리, 된서리, 강물 소리, 하얀 뿌리, 꽃대공, 들창문 고운 살결, 고향산 먼 나루터, 노 저을 외진 길이라는 애틋한 이미지들의 연첩으로 노스탤지어를 무한정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맞는 가을이지만 이번 가을은 더욱 다른 느낌이다. 전무후무한 난제가 쉬이 잦아들지 않고 있어서 그러하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속에 잠들어 있는 시심을 깨워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 길은 곧 시와 함께 하는 삶이다. 오래 전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다르지 않다고 말한 이가 있다. 「녹색평론」주간 평론가 김종철이다. 자연 그대로의 삶을 향한 열망을 품고 노력을 기울일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향 가을’과 같은 시편을 더 많이 찾아 읽어야겠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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