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두 곳의 삼화령 차의 성지로 방문객 늘고 있어

▲ 충담 스님이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차 공양을 올렸다는 삼화령 미륵불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연화대좌. 미륵불은 어디에도 없고 불상의 대좌만 경주 남산에 남아 있다.
▲ 충담 스님이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차 공양을 올렸다는 삼화령 미륵불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연화대좌. 미륵불은 어디에도 없고 불상의 대좌만 경주 남산에 남아 있다.
경주 남산의 삼화령은 삼국유사 두 곳에서 소개되고 있다. 경덕왕 편에서 충담스님이 매년 3월3일과 9월9일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는 일을 소개하면서 등장한다. 또 한 번은 생의 스님이 꿈에서 만난 돌미륵을 찾아 남산 삼화령에 모시고 생의사를 지었다는 대목에 나타난다.

그러나 경주 남산의 삼화령 위치에 대해서는 사학자들조차 정확하게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장창골 삼존미륵상이 출토된 곳과 연화대좌가 남아 있는 순환도로 위의 절터, 이 두 곳을 삼화령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경주 남산 삼화령은 삼국유사에서 충담 스님이 차 공양을 한 내용이 소개되어 전국적으로 차의 성지로도 알려지고 있다. 경주 신라문화원은 매년 충담 스님의 차 공양하는 문화를 축제로 승화시켜 진행하고 있다. 경주의 차인들과 전국의 차 마니아들도 남산의 삼화령을 많이 찾고 있다.

▲ 충담 스님이 차를 공양했다고 전해지는 삼화령 미륵불로 추정되는 애기부처로도 불리는 삼화령 미륵삼존불.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 충담 스님이 차를 공양했다고 전해지는 삼화령 미륵불로 추정되는 애기부처로도 불리는 삼화령 미륵삼존불.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삼국유사: 생의사의 돌미륵

선덕왕 때였다. 생의 스님이 도중사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꿈에 한 승려가 이끌어 남산으로 올라가더니 풀을 묶어 표시해 두라고 했다. 산의 남쪽 동네에 이르러 말했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다오. 스님께서 꺼내 고갯마루 위에 안장해 주세요.”

스님이 꿈에서 깨어나 동료와 함께 표시해 둔 곳을 찾아 땅을 파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스님은 돌미륵을 꺼내 삼화령 위에 모셨다.

선덕여왕 12년 갑진년(644)에 절을 짓고 들어간 다음 생의사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 애기부처 삼화령 미륵불이 출토된 곳으로 전하는 장창곡과 부처골 사이 언덕에 돌기둥이 남아 있다.
▲ 애기부처 삼화령 미륵불이 출토된 곳으로 전하는 장창곡과 부처골 사이 언덕에 돌기둥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경덕왕과 충담

경덕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째였다. 5악과 3산의 신들이 간혹 어전의 뜨락에 나타나곤 했다. 3월3일. 왕이 귀정문의 다락에 올라 주위 신하들에게 “누가 거리에 나가서 좋은 스님 한 분을 모셔오라”고 명했다.

그때 마침 큰스님 한 분이 위엄 있게 잘 차려입고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려다가 왕 앞에 보였더니 “내가 말하는 좋은 스님이 아니다”라며 그를 물리게 하였다.

다시 한 스님이 허름한 승복을 입고 앵통을 진 채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다락 위로 불러오게 했다. 스님의 앵통 안을 보니 다구가 가득했다.

“그대는 뉘신가?”

“충담이라 하옵니다.”

“어디를 다녀오시는 겐가?”

“저는 매번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지금 막 바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 돌미륵이 출토된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의 인공적인 힘이 가해진 듯한 바위. 주변이 절터 또는 창고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돌미륵이 출토된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의 인공적인 힘이 가해진 듯한 바위. 주변이 절터 또는 창고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과인에게도 차 한 잔 주실 수 있는가?” 하니 충담은 곧 차를 끓여 바쳤다. 차 맛이 특이했고, 찻잔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했다.

“짐은 일찍이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한가?” 물으니 “그렇습니다”고 답했다.

왕이 다시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잘 다스리는 노래를 지어주실 수 있는가”라고 권하자 충담은 곧바로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 왕은 “좋다”며 충담을 왕사에 봉하였다. 충담은 “중은 중이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며 거듭 절하며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삼화령 돌미륵이 출토된 곳과 연접해 있는 남산신성 흔적.
▲ 삼화령 돌미륵이 출토된 곳과 연접해 있는 남산신성 흔적.
◆경주 남산의 삼화령 미륵불

신라 향가의 대가이자 차의 달인으로 추앙받는 충담 스님은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삼화령의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했다. 현재 이곳에는 미륵불을 모셨던 연화대좌만 남아 있다.

연화대좌가 남아 있는 삼화령에 올라서면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전망이 확 트인 풍경이 선경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연화대좌 위에 있었을 미륵불은 어느 곳에서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석조삼존불상은 삼화령에서 옮겨왔다고 설명한다. 100년 전의 사진에는 석실 속에 미륵상과 보살상 2구가 봉안되어 있다. 박물관의 돌미륵을 옮겨온 곳은 장창골의 돌기둥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삼화령 미륵삼존불은 신라 7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선덕여왕 12년 644년에 창건된 생의사에 이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삼존상은 모두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큰 얼굴과 통통하고 단아한 체구의 4등신으로 표현되었다.

삼화령 미륵불의 본존불은 두 다리를 내리고 의자 같은 곳에 걸터앉은 의좌상으로 인도나 중국의 상에서 많이 보이는 형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이다.

▲ 연화대좌가 남아있는 삼화령에서 바라보는 고위봉의 풍경.
▲ 연화대좌가 남아있는 삼화령에서 바라보는 고위봉의 풍경.
좌우의 보살입상은 얼굴 모습이 단아하고 복스러워 삼존불을 모두 애기부처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살상은 모두 삼면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이 둥글고 미소를 띠고 있다. 눈은 부은 듯 두툼하게 여래상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삼존불상의 자세, 법의의 처리, 옷주름 선의 조각수법 등은 삼국시대 7세기에 나타나는 불상의 양식으로 당나라 초기 불상의 특징과 비슷하다.

또 삼존불은 삼국유사의 경덕왕과 충담사, 생의사 돌미륵 편에서 나타나는 644년 조성했다는 기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 양식 등이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 삼화령과 이웃해 있는 지역의 곳곳에 석조 유물들이 남아 있다.
▲ 삼화령과 이웃해 있는 지역의 곳곳에 석조 유물들이 남아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생의사의 돌미륵

선덕여왕이 고구려, 백제와의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기 위한 계책을 마련하는 데 골몰했다. 이때 중국으로부터 자장이 돌아와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우면 주변의 나라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했다.

선덕여왕은 옳게 여기고 백제의 익산미륵사의 탑을 건축한 경험이 있는 장인 아비지를 초빙하고, 김춘추의 아버지 용수를 총감독으로 임명해 9층 목탑을 1년 만에 완성했다.

여왕이 목탑을 튼튼하게 하루 빨리 건축하도록 독촉을 했지만 기초석을 놓은 다음 아비지는 기둥을 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매일 술에 취해 건축 현장에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왕이 용수를 불러 일의 진척을 서두르라고 아무리 다그쳤지만 아비지는 도무지 기둥을 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왕이 궐에서 일을 마치고 가만히 앉아 고민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꿈에 백발의 신선이 나타나 여왕에게 걱정거리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여왕은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화를 지켜주기 위해 9층 목탑을 세워야 하는데 장인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 삼화령으로 오르기 위해 용장리 마을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김시습의 법명을 따라 지은 설잠교.
▲ 삼화령으로 오르기 위해 용장리 마을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김시습의 법명을 따라 지은 설잠교.
그러자 도사가 내일부터 당장 탑을 세울 수 있도록 해줄 터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말하며 부탁이 하나 있다고 했다. 선덕여왕이 크게 감사하며 무슨 일이든지 도사님의 말대로 할 것이라 약속했다. 그러자 도사는 남산 삼화령에 내가 앉아 있는데 생의라는 스님이 집도 없이 공양하고 있으니 절을 하나 지어주면 된다고 했다.

여왕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었지만 꿈에서 나눈 이야기가 생시인양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음날 일어나 황룡사로 나가보았다. 벌써 기둥이 우뚝 서 있고, 아비지와 목수들이 부지런히 집을 짓고 있었다.

신기하게 여긴 여왕은 직접 신하들과 남산 삼화령으로 올라가 불상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꿈에 보았던 도사가 불상의 모습과 똑 같았다. 여왕은 생의 스님이 머물며 공양하기 좋도록 절을 지어주고, 매년 곡식을 풍부하게 보내주도록 신하에게 일렀다.

황룡사 9층 목탑이 완성되는 날 선덕여왕은 꿈에서 다시 도사를 만났다. 여왕이 반갑게 합장을 하자 도사는 걱정스런 눈으로 “목탑이 나라를 살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한편 여왕의 안전은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목탑의 9층은 주변의 나라를 상징한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을 뜻하며 이들을 진압시킨다는 목적이다. 이후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지만 선덕여왕은 탑을 완성하고 3년 만에 죽어 도리천으로 들어갔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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