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 숨쉬는 600년 전 양반네 마을로 시간여행

▲ 하회마을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살아 숨 쉬는 상징의 공간으로 손꼽힌다. 사진은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 전경.
▲ 하회마을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살아 숨 쉬는 상징의 공간으로 손꼽힌다. 사진은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 전경.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상징 공간으로 손꼽히는 곳으로써 가장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한 곳이 안동 하회마을이다.

안동 하회마을은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됐다.

마을 주민들에 의해 전승되는 다양한 생활 문화가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이 지키고 이어가야 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 받은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하회마을은 주택과 서원, 정자와 정사 등 전통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마을의 공간 배치가 조선시대 사회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듬고 있다”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보존돼 있어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밝혔다.

또 이들이 향유한 예술 작품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 및 문화적 성과물, 공동체놀이, 세시풍속과 관·혼·상·제례 등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신앙에 관계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점 등도 높이 평가했다.

유네스코는 하회마을을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결정하는 결의문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다”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써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의 삶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등재 이유를 설명했다.

◆하회마을의 특징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와가(瓦家: 기와집)와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됐다.

하회마을은 풍수 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했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다.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다.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돼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 큰 와가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돼 있는 것도 특징이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생활 문화와 고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돼 있다.

하회마을은 현재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 127가옥이 있으며 437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다.

▲ 하회마을 풍산 류씨 대종가(大宗家) 양진당 전경. 입암고택이라고도 부른다.
▲ 하회마을 풍산 류씨 대종가(大宗家) 양진당 전경. 입암고택이라고도 부른다.
◆양진당(보물 제306호)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 현판은 겸암 류운룡 선생과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공의 아호)에서 유래했다.

입암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이라 부른다. 양진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 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 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공존하는 고택이다.

풍산 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 전서 류종혜 공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 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해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했다.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불천위는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한다.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충효당(보물 제414호)

충효당(忠孝堂)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 졸재 원지 공을 도와서 지었다. 증손자 의하 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 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돼 서애 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 기념식수가 있다.

▲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을 구상하고 저술한 곳이다.
▲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을 구상하고 저술한 곳이다.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옥연정사(玉淵精舍)는 서애 선생이 노후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을 하기 위해 세우려 했으나 재력이 없어 짓지 못했다.

승려 탄홍이 10년 동안 시주를 모아 선조 19년(1586)에 완성한 우정의 산물로 선생의 덕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다.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했다. 옥연은 정사 바로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서애 선생이 이름 했다. 서애 선생은 옥연정사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을 구상하고 저술했다.

▲ 하회탈 (국보 제121호)
▲ 하회탈 (국보 제121호)
◆하회탈 (국보 제121호)

하회탈은 현재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등 9개의 탈만 전해지고 있다. 3개(총각탈·떡다리탈·별채탈)의 탈이 분실됐다.

하회탈의 작가는 허도령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허도령에게는 사랑하는 처녀가 있었다. 허도령이 신의 계시를 받고 탈의 조각을 위해 홀로 외딴 집으로 가기 전에 탈을 완성하기까지는 절대로 찾아오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래 기다리던 처녀가 사모하는 정을 가누지 못하고 허도령이 혼자 있는 집을 찾아가서 차마 문을 열지는 못하고 문구멍을 뚫어서 안을 들어다 보는 중 허도령은 이를 보자 부정을 타서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기 때문에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다. 그 해의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회탈은 재료가 오리나무로서 표면에 옻칠을 2겹 3겹으로 칠해 정교한 색을 내었다. 격식과 세련됨도 갖췄다. 부락에서는 별도로 동사(洞舍)를 세워서 가면들을 보존해 왔다.

특히 각시 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을 할 때 외에는 볼 수 없었다.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하는 금기나 제약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 음력 7월16일 하회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매년 재현되고 있다. 지난해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때 열린 선유줄불놀이 모습.
▲ 음력 7월16일 하회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매년 재현되고 있다. 지난해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때 열린 선유줄불놀이 모습.
◆하회선유줄불놀이

해마다 음력 7월16일 한여름 밤에, 하회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부용대 단애 밑을 흐르는 강 위에서 선유시회를 겸한 불꽃놀이 축제가 있었다. 이 축제를 오늘날은 속칭 하회줄불놀이라 한다.

이 불꽃놀이는 높이가 70m 이상인 부용대 단애의 밑을 흐르는 화천(화산에서 이름을 딴 낙동강의 별칭)과 백사장 상공의 여기저기에서 은은하게 작은 불꽃들이 터지고, 화천에서는 ‘달걀불’이라 부르는 등불들이 상류로부터 유유히 떠내려 오면서 불빛이 강물에 아롱거리는 가운데 강 위에서 배를 띄우고 선유시회를 한다.

부용대 정상에서 불붙인 솔가지묶음을 절벽 아래로 던져 활활 타는 불꽃이 절벽 아래로 폭포처럼 떨어질 때 백사장과 배 위의 모든 사람은 일제히 “낙화야”라고 크게 환성을 올려준다.

이 낙화는 백사장 위의 은은하게 터지는 수없이 작은 불꽃 및 강 위의 ‘달걀불’과 함께 그 밝기와 주기에 의해 강약장단의 조화를 이루면서 불꽃놀이의 흥취를 한껏 고조시킨다.

선유줄불놀이는 매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기간에 단 두 차례 부용대에서 떨어지는 낙화를 볼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하회마을을 찾은 1999년 처음으로 관광객 100만 명 기록을 세우면서 ‘가장 한국적인 곳’으로 평가받아 매년 100만 명이 넘는 국내외 관광객이 찾고 있다.



김진욱 기자 wook9090@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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