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한 사랑

발행일 2020-08-09 14:37:3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비가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을까? 끝없이 쏟아 붓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제발 이제 그만 내렸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창가에 서서 장대비를 바라보다가 커다란 우산을 챙겨 문을 나섰다. 마당에는 빗물이 시냇물처럼 모여서 흘러가고 있다. 도로가를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화분에는 노란 꽃들이 비를 맞으며 흔들리고 있다. 지금 한창 피어난 밀레니엄 벨, 눅눅해진 날씨에도 생긋생긋 고개를 흔들며 인사 짓을 하고 있다. 해를 좋아하는 식물이라 직사광선이 비치는 곳에 심어두었을 터이지만, 한여름 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지니 저 꽃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꽃이 물에 닿아 쉬이 녹아내리지나 않을까 싶어 애처롭다. 밀레니엄 벨의 꽃말은 ‘절실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은가. 정말이지 어서 빨리 장마가 그쳐서 해가 반짝 나오기를 밀레니엄 벨 꽃을 보면서 나도 절실하게 바란다.

어느덧 팔월 초가 지나간다. 예년 같으면 휴가가 한창일 터이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바이러스도 걱정되고 엄청난 홍수가 몰고 온 피해가 너무 커서 휴가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 여행하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집에 머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기분을 잘 챙겨야 할 것 같다. 어느 순간이라도 우울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지 않도록 신경 쓸 수 있도록 바쁘게, 무엇에든 몰두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답인 것 같다. 그렇게 정신을 쏟다 보면 시간도 후딱 지나가고 웬만한 더위는 느낄 겨를도 없이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는가.

우연히 본 프로그램이었는데 참 신선했다.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였다. 이름하여 집구석 카운슬링, 집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는 모토였다. 정리의 달인 미니멀한 삶의 표본이라는 여배우와 맥시멀 리스트의 대표를 내놓으라면 서러워할 개그우먼이 듬직한 남자 출연진과 함께 집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운 만큼 더해지는 행복을 추구하며 딱 필요한 것만 남기고 정리한다. 어수선하고 뒤죽박죽이었던 의뢰인의 집이 그들의 손길로 착착 정리되어 깔끔하고 아늑한 집으로 탄생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을 정도였으니 정말 잘 정리 정돈된 집에서는 마음 치유가 절로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처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을 때 무엇엔가 몰두하는 것이 필요한 때에는 정말이지 집 정리만큼 좋은 아이템도 없는 듯하다. 집안 정리를 통해 물건에 얽힌 추억도 돌아보고 정리할 것들은 비워내면서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 또한 보람 있지 않으랴. 비운 만큼 생기는 여유에 또 소소한 행복으로 채울 수 있다는 신박한 정리, 구석구석 살피다 보면 잊혀있던 것들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며칠 지나 따라서 정리를 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묵혀두었던 서랍장부터 열었다. 붙박이로 있어서 좀체 손이 가지 않았던 서랍, 중요 서류를 넣어뒀지만 열어 볼 일이 없었다. 친정아버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등기나 각종 서류 정리를 도맡아 해주셨기에 한 번도 내 손으로 그것을 챙기지 않았다. 서랍을 여니 잊고 있던 물건들이 수십 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나하나 들추다가 추억에 잠겨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입주 때 샀던 채권 뭉치가 들어 있었다. 몇 백이나 되는 금액의 채권이 아직도 있었다. 갑자기 공돈이 생기다니, 기뻤다. 그러나 그 느낌도 한순간, 인출할 수 있는 유효기간이 벌써 지난 지 한참이나 된 것이 아닌가. 원금 도래 5년, 그 이후 5년이 지나면 국고로 들어간다고 돼 있는 그 빳빳한 채권, 은행에 알아보니 이제는 종이쪽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하늘나라로 아버지 떠나신 지도 벌써 오래전이니 말이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때맞춰 못 찾으면 종이쪽에 불과한 것을! 아버지도 오래 살아 계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황망히 떠나시더니…. 살뜰히 챙겨주시던 아버지의 깊은 정이 사무쳐 정리하다 말고 솟구치는 눈물을 훔쳤다.

집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고 하지 않은가. 비운 자리에 행복을 더하는 ‘신박’한 집구석 카운슬링을 본보기로 해 삶을 돌아보며 평소에 정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서는 욕심을 내려놓고 단순하게 생활하면서 꾸준히 육체 건강을 챙겨 활발하게 활동하고 마음을 잘 챙겨야 하리라. 기억력도 챙기고 판단력도 잘 관리해 깜빡깜빡 잊기 쉬운 것들에 대해서도 잔머리 쓰기 훈련이라도 하여 꾸준히 신경 써야 할 사항이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 앞날을 위해 정리의 스위치를 올려보자. 절실하게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부터 차곡차곡 정리 정돈이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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