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

에녹 원장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린다. 하얀 눈발을 헤치며 시골마을 종착역을 향해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깃발을 올려 정지신호를 보낸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으로 뒤덮인 간이역엔 오늘도 철도원인 ‘그’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뒤늦게 얻은 딸이 급성 열병으로 아내의 품에 안겨 싸늘하게 돌아온 날에도, 아내가 깊은 중병을 얻어 큰 도시의 병원으로 떠나던 날에도 ‘그’는 그 자리에서 열차를 맞이하고 보내야 했다. 자신은 ‘철도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철도원이므로... 소중한 가족인 딸과 아내를 먼 하늘로 떠나보낸 시골 역에서 ‘그’는 정년을 맞이하고 열차노선의 폐지를 통보받게 된다. 쌓인 눈 위로 끝없는 눈발이 날리던 날, ‘그’는 딸과 아내가 있는 곳을 향해 떠나는 마지막 여정 속에서 눈을 감는다.

서른을 갓 넘긴 시절에 필자가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을 나열하면서 그 날의 기억이 새삼 가슴을 아리게 한다. 첫 딸을 낳고 내 욕망인 꿈을 위해 신림동에 머물러야 했던 상황이 영화 속 ‘그’와 감정이입이 일어난 탓인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를 그 때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자기연민인 줄로 알았다. 지독하리만치 자신의 직업과 역할에 충실한 ‘그’에게서 나는 혹여 내 자신의 면죄부를 찾고 있지 않았는지 지금에서야 의문이 든다.

‘가장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의문 속에서 경제적 부양을 최우선으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5~6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 가장의 역할은 가족들의 의식주 해결에 맞춰져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잔업을 해서라도 평소보다 많은 월급봉투를 가져오길 원했다.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이나 기업의 발전이 곧 자신의 발전을 의미했고 가족의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장인정신으로 직업을 전문화하고자 하는 거대한 포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개인적 여유와 욕망을 억누른 자기희생이라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결과가 전문가인지도 모른다. 흔히 ‘꼰대’와 ‘틀딱’이라 불리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그’들이다. 묵묵히 자신의 일이 천직이라 여기며 살아온 ‘그’들이기에 급변하는 시대 앞에 두려움도 있었으리라. ‘자유와 민주’ 그리고 ‘노동해방과 혁명’으로 들끓던 80년대엔 가치관의 혼동과 정체성에 대한 회의도 있었으리라. 가족만을 위한 그들의 희생이 가족을 등진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비난받을 때 분명 그들은 슬픔이 앞섰음이 분명하다. 깃발 하나와 호루라기로 열차를 세우고 떠나보내던 철도원인 ‘그’가 가진 슬픔처럼.

OECD국가로서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선지 오래다. 6.25전쟁 이후 반세기만에 이룬 성과로서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폐허 속 국제사회로부터 원조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 조차하다. 이렇듯 단기간에 고도의 성장을 이룬 나라는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는 평가도 있다. 성장의 결과로 여유로운 삶이 보장되었으며 서구식 문화의 영향으로 개인주의적인 가족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져 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장의 기반이 된 ‘그’들에 대한 찬사와 영광은 없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애써 지워 나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세대간 갈등 속에서 ‘그’들은 어느새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무지한 세뇌교육의 대상자로 낙인을 받고 있다. 편법보다는 우직하게 조직에 몸 담아온 ‘그’들임에도 그 조직을 깨지 못한 무능한 조력자로 치부되고 있다. 과연 ‘그’들은 진정 무지하고 가정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우리는 법보다 도덕과 양심이 앞선다고 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법과 양심이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양심이 이데올로기적일 때 다른 양심의 인간에 대해 잔인하다’란 말이 있다. 이는 결코 양심이란 것이 절대선의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란 것이다. 누군가를 재단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그것을 지키려는 ‘그’들의 시대적 양심을 이해해야만 한다. 지금의 자유와 민주가 어느 한 집단이 만들어 온 전유물이 아니듯 ‘그’들이 만들어 온 공적도 인정해야만 한다.

선로 위 열차가 서야 할 시간과 떠나야 할 시간, 그것은 약속이며 질서이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이끌어 온 ‘그’들의 노력이며 슬픔이었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