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환

객원논설위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 야당의원의 질의에 대해 법무부장관이 “소설 쓰시네”라고 말하자 그 국회의원이 “…소설가가 아닙니다”고 응수했다. 이 장면을 보고 ‘소설을 쓰느냐, 마느냐’를 갖고 왜 국회에서 생뚱맞게 승강이를 할까, 의아했다. 여기서 장관의 “소설을 쓴다”는 말은 ‘근거 없는 거짓말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 반면에 국회의원이 응수한 “소설가가 아니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우선 소설 쓰는 사람이 소설가인데 자신을 보고 소설 쓴다고 하니 소설가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소설의 참뜻을 왜곡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리고 소설을 ‘근거 없는 거짓말’이란 의미로 쓴 장관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 자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업으로 삼는 ‘소설가’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소설에 대한 부정적이고 차별적 함의가 그 기저에 깔려 있다. 물론 소설가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포괄하는 중의적 시각으로 볼 여지도 배제할 순 없다. 세간의 이슈가 된 위 사안에서 올바른 언어 활용은 국회의원의 말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의 경우다. 어쨌든 국회에서 발생한 지도층 인사들의 한심한 작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소설은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악의적인 헛된 거짓말도 아니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꾸며내어 공갈·협박하거나 자기주장의 관철을 꾀하는 궤변도 아니다. 소설은 ‘있을 법한 그럴듯한 이야기’이거나 ‘참말보다 더 참말 같은 픽션’이지만 그러한 픽션을 통해 ‘가짜를 진짜라고 믿도록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 모두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다양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독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하나 뿐인 인생을 폭넓게 관조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 한 알차고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다. 독자는 소설 속의 삶을 간접 경험함으로써 지난 삶을 성찰하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알차게 설계할 수 있다. 따라서 거짓말은 이기적인 의도를 갖는 임시방편적인 사회악이지만 소설은 인생이나 그 단면을 창조해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예술작품이다. 소설과 거짓말의 기본적인 차이도 인식하지 못하는 작자가 정의를 구현해야 할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실로 참담할 따름이다.

소설가는 달콤한 세속적 가치를 애써 외면한 채, 인간의 본질이나 삶의 참모습에 천착하면서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다. 금전만능이 판치는 세상에서 문화적 자존감 하나로 버티는, 잇속 없는 사람이다. 글 쓰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면서 피 말리는 창작에 매진하는, 영혼이 자유롭고 순수한 사람이다. 이런 순진한 사람들을 왜 느닷없이 정치판에 무단히 끌어들여 뭇사람들 앞에 우사를 주는지 알 수 없다. 이런 무고한 사람들에게 왜 뜬금없이 모욕적인 말을 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소설을 쓸모없는 나쁜 거짓말로 폄훼하고 수많은 카메라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오직 명예만 바라보고 정진하는 사람들을, 사기를 진작시켜주지 못할망정, 아무 생각 없이 유린한 일은 추악한 갑질에 다름 아니다. 개념 없는 정치인들의 사려 깊지 못한 언행으로 묵묵히 정진하는 예술가들에게 공연히 모욕감이나 자괴감을 주지 않았는지 우려스럽다. 소설을 ‘헛된 거짓말’로 보는 삐딱한 의식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소설가들이 졸지에 항간의 웃음거리로 희화화된 상황을 본다면 연극이나 영화 등 다른 예술장르에 대한 그들의 시각도 충분히 미뤄 짐작된다.

정의의 수호자라는 사람이 국정을 논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소설가를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으로 비하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모습은 그야말로 추하고 천박하다. 열악한 창작여건 아래 고군분투하는 소설가들을 거짓부렁이 사기꾼인양 근거도 없이 매도한 일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문화예술에 대한 차별적이고 천박한 위정자의 시각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 같아 몹시 우울하다.

‘지탄받는 나쁜 거짓말’을 ‘소설 쓰는 일’에 빗대어 비아냥대는 잘못된 말버릇이 언제부턴가 항간에 간간이 있어왔다. 이번 사건을 기화로 소설을 근거 없는 거짓말로 비유하거나 문화예술을 턱없이 얕잡아보는 그런 풍조가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제4차 산업혁명시대 글로벌 사회엔 문화예술이 곧 생명력이자 경쟁력이다. 문화예술은 단기간에 육성되는 사항이 아니다. 영양가 없고 대책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화예술인은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사람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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