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72) 흥륜사 금당십성-자장과 표훈

발행일 2020-07-20 14: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자장 당 태종에게 두터운 신임 얻어, 황룡사9층목탑 세워 나라 안정 도모

신라 경덕왕 때에 표훈 대덕이 머물렀던 불국사는 지진에 견디는 공법으로 건축된 내용들이 드러나고 있다. 국보 제2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청운교 백운교는 홍예기법으로 건축돼 1천300년이 지나도 건축 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자장은 신분이 상당히 높은 신라 진골 대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황제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덕망이 높은 승려였다.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그를 돌려줄 것을 요청해 돌아오게 할 정도로 자장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은 분황사에 머물며 대국통이 되어 왕실에서 법회를 주관하기도 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목탑이 준공되고 황룡사 제2대 주지로 주석했다.

반면 대덕 표훈은 삼국유사에서 천제를 만나 왕의 뜻을 전하는 등으로 천궁에까지 드나드는 술법을 펼치는 도력이 높은 승려로 전해진다. 표훈은 의상대사의 십대제자 중 하나로 불국사에 머물면서 아들이 없던 경덕왕의 심부름으로 천제를 만나 부탁해 혜공왕을 낳게 했다.

자장과 표훈은 신라시대 불교진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신라 십성으로 선정됐다. 같은 금당십성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자장이 널리 알려진데 반해 표훈은 삼국유사에 잠깐 등장하는 이외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전해지는 신라십성 자장과 표훈의 단면을 살펴본다.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당나라 황제에게도 높은 신임을 얻었던 자장율사의 초상.
◆삼국유사: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

대덕 자장은 김씨이고, 본디 진한의 진골 무림 소판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가 높은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뒤를 이을 자식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에 삼보에 마음을 기울여 천부관음에게 나아가 자식 하나 낳기를 바라며 축원했다.

“만약 사내아이를 낳으면 불교의 바다에 나루터와 다리가 되도록 키우겠나이다.”

문득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가슴 속으로 들어오더니 아이를 가져서 석가모니와 같은 날 태어났다. 이름을 선종랑이라 했다. 정신은 맑고 뜻이 슬기로웠으며 글은 빛나고 생각이 높아 세상의 맛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는 더욱 세상의 번잡한 것이 싫어졌다. 처자식을 버리고 밭과 동산을 내놓아 원녕사를 만들었다. 홀로 그윽하고 험한 곳에서 지내며 호랑이와 승냥이도 피하지 않고 고골관을 닦았다. 조금이라도 권태로움이 닥치면 곧 작은 방을 지어 둘레에는 가시나무 담을 두른 채 그 안에 벌거벗고 앉아 있었다. 움직이면 곧 가시바늘이 찔러댄다. 머리는 기둥에 달아두고 명상이 흐려지는 것을 물리쳤다.

마침 재상 자리가 비자 귀족 집안 간에 의견이 맞아 여러 차례 자장을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이 이에 “오지 않으면 참형을 내리겠다”는 칙명을 내렸다.

자장이 이를 듣고 “내가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계를 깨고 백년을 사는 일은 바라지 않노라”고 했다.

불국사에 주석하며 천제를 만나 경덕왕의 아들을 점지해 줄 것을 부탁했던 표훈 대덕의 초상.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 있다.
사정을 들은 왕이 출가를 허락했다. 이에 바위 수풀 속으로 깊이 숨어서 먹는 것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 이상한 새가 과자를 물고 와 공양하니 손으로 받아먹었다. 아련히 꿈속에 하늘의 사람이 내려와 오계를 주자 그제야 비로소 골짜기를 나왔다. 동네의 남녀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자장은 변방에 태어난 것을 탄식하며 서쪽으로 가 큰 가르침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평 3년 병신년(636)에 칙명을 받아 제자 승실 등 열 명 남짓 데리고 서쪽 당나라 청량산으로 들어가 보았다.

산에는 만수대성의 소상이 있었다. 그 나라에서 이 상에 대해 “하늘님이 기술자를 데리고 와 만든 것이다”라고 전해 내려온다. 자장은 이 불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에 잠겼다. 꿈에 불상이 이마를 만지더니 산스크리트어로 된 계를 주었다. 하지만 깨어나서도 해석하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특이하게 생긴 어떤 스님이 오더니 해석해 주었다.

또 “비록 수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한들 이 글을 넘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불국사 대웅전은 임진왜란에 불 타고 조선시대 다시 건축된 건물로 보물 제174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자장은 이미 성스러운 가르침을 입었음을 알고, 북대를 내려와 태화지를 거쳐 당나라 서울로 들어갔다. 태종은 사람을 보내 위로하며 승광별원에서 편히 지내게 해 주었다. 은총을 내림이 빈번하고 두터웠다. 그러나 자장은 그 번잡스러움을 싫어해 황제에게 글을 올리고 종남산 운제사의 동쪽 낭떠러지에 들어가 바위를 잇대 방을 지었다. 3년을 지내는 동안 사람과 신이 계를 받고 신령스런 응답이 날마다 번갈아 나타났다. 글이 너무 길어져 싣지 않는다.

다시 서울에 들어오자 황제가 사람을 보내 위로했다. 비단 20필을 내리고 옷감으로 쓰도록 했다.

정관 17년 계묘년 (643)이었다. 본국의 선덕왕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돌아오게 해달라고 했다. 황제는 허락해 주면서 궁궐로 불러들여 가사 한 벌과 좋은 비단 500단을 내려 주었다. 세자도 200단을 내렸으며 여러 가지 예물을 갖추어 주었다. 자장은 자기 나라에 경전과 불상이 충분치 못하다 하여 대장경 1부와 여러 번당에서 화개까지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요청해 모두 실었다.

본국에 이르니 온 나라가 크게 환영했다. 왕은 분황사에 머물게 하고, 쓸 것과 시중들 사람을 충분히 내려주었다. 한번은 여름에 궁중으로 불러 들여 대승론을 강독했으며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일곱날 일곱 밤을 강연했다.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어둑어둑 깔려 강당을 덮었다. 남녀 승려와 신도 모두 그 신이스러움에 깊이 감탄했다.

조정에서 “불교가 동쪽으로 온 지 오래되었지만 부처님의 일을 맡아 받들고 수행하는 규칙이 없는 채 지내고 있다. 잘 짜여진 규정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잘 정돈할 수가 없다”고 의논했다. 의논에 따라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는 칙령이 내렸다. 무릇 승려들을 하나로 이끌어 가도록 모든 권한을 승통에게 주었다.

국보 제21호로 지정된 불국사의 석가탑. 기단은 자연석의 생긴 모양에 따라 돌을 깎아 세운 거렝이공법이 적용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자장과 당 태종의 약속

자장은 신라 소판 무림공의 아들로 590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진평왕 12년으로 진흥왕의 정복전쟁 후유증에 의한 외세침략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

자장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처자식마저 등진 채 깊은 산으로 들어가 처절한 수신의 길을 걸었다. 골방에서 알몸으로 가시덤불 속에 앉아 머리는 천정에 매달아 졸음을 좇아가며 불도 삼매경에 들었다.

왕이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려 불렀지만 목숨을 걸고 응하지 않았다. “계를 지키며 하루를 살 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며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왕은 그에게 승려의 길을 갈 것을 허락했다.

국보 21호와 22호로 지정된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이 불국사 대웅전 앞에 나란히 서 있다.
선덕여왕이 즉위하고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 청량산에서 기도하며 정진해 문수보살로부터 사구계를 받았다. 이에 당나라 태종의 신임과 예우를 받으며 장안에서 수도했다.

당 태종 이세민은 반역 호족들을 진압하는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제거하자 아버지인 당 고조로부터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천책상장의 별호를 얻을 정도로 호걸이었다.

이러한 태종이 나라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정복전쟁을 이어나가자 자장은 그의 신임을 바탕으로 신라와의 전쟁 불가론을 펼쳐 불가침의 약속을 얻어냈다. 태종이 고구려 정복의 꿈을 펼치며 승승장구 할 때의 일이라 대단한 성과로 평가된다.

자장은 당시 볼모로 당나라에 와있던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과 머리를 맞대어 신라를 지키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김인문은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에게 신라가 고구려를 칠 수 있는 병력을 지원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자장은 태종에게 신라와의 협력을 다짐하는 약속을 얻어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의 건의로 선덕여왕이 황룡사에 세웠던 9층 목탑 모형을 모델로 경주보문단지에 건립된 황룡원.
자장은 태종의 야욕을 간파해 고구려와 맞대면하고 있던 거란을 꾀어 고구려와 전쟁하도록 종용하고, 약해진 거란과 고구려를 한꺼번에 침략하는 전략을 제시해 더욱 신임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자장은 신라와의 동맹을 제의해 태종의 선심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태종의 야욕에 찬 속마음을 헤아린 자장은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황룡사 9층 목탑 건축을 건의해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는데 집중했다.

이때 자장은 대국통이 되어 신라에 화엄사상을 소개하며 승려들의 질서를 세우는데도 크게 공헌했다.

선덕여왕이 건립해 자장과 원효 등의 대승들이 주석하며 신라 대중불교의 산실이 되었던 분황사 입구.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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