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애의 영화산책…정지우 감독 ‘은교’

발행일 2020-07-16 17:19:4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젊은 여자의 몸

시인 천영애
성추행이라는 듣기조차 불편한 말이 며칠간 매스컴을 오르내린다.

잊어버릴만 하면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는 이 말에 모든 여성들은 무심코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볼 것이다.

몸이 대상화되면서 몸은 비로소 수치를 느끼고, 타인의 시선에 극도로 예민해진다. 누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인 나의 ‘몸’을 본다는 느낌은 수치와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불러온다.

역사 이래로 여성의 몸은 늘 대상화되어 있었고, 여성들은 그래서 자신의 몸을 감추어야 했다. 자아와 분열된 몸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그 묘한 느낌을 남성들은 갖고 있을까.

영화 ‘은교’는 아름다운 시적인 영화이다. 영화 자체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늙어가는 노인의 젊은 여인에 대한 사랑이라니, 아름다운가?

사랑이라는 말의 범주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적어도 영화에서만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추악한 탐욕으로 보일 듯도 하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그렇지만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처럼 흔하지 않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욕망은 여자와 남자가 비슷할 것인데 사회적인 시선이 늙은 여자의 욕망을 가두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욕망을 남자는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성 인식이 왜곡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의 몸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일상적으로 흔히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 차를 극복한 사랑은 가능하다. 인간의 감정은 다변하여 사랑에 나이가 무슨 관계이겠는가. 그런데 한쪽은 사랑이라 하지만 한쪽은 성추행이라 느끼는 관계는 사랑이라는 말로 그 관계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 감정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가능한데 남자의 일방적인 몸짓을 여자는 사랑이라는 말로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여자인 나는 이런 상황들이 모두 불쾌하게 다가온다. 하나의 일로 그 사람의 삶 전부를 해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건으로 불거지는 하나의 일로 그 사람의 의식을 더듬어 볼 수는 있다.

영화의 은교는 영화의 은교일 뿐이다.

대부분의 젊은 여자들은 늙은 남자의 성적인 표현을 추근거림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불쾌해하고 치욕스러워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여자들이 왜 남자의 추근거림을 당차게 거부하지 못하느냐고?

여자들은 그 추근거림조차 위협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흔히들 하는 말처럼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다르다.

여자의 추근거림을 남자는 전혀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 소극적으로 그 상황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만나기만 하면 성적인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남자가 더러 있다. 남자는 농담이라고 하지만 여자에게는 욕이다.

웃자고 하는 말에 더러는 죽자고 덤비는 것이 그런 이유이다. 같이 웃자고 웃어주면 그 음담패설이 끝이 없고 농도도 더 짙어지기 때문에 여자가 갑자기 죽자고 덤비는 이유는 그 농담을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불쾌해서이다.

그런데 그게 사건화되면 갑자기 남자는 은교를 사랑했던 노교수같은 태도를 취한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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