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71) 흥륜사 금당십성-원효와 사파

발행일 2020-07-13 09:46:3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신화처럼 윤회의 삶을 그려내는 원효와 사파

신라 흥륜사 금당십성으로 그려져 있던 원효의 초상을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 그려두고 있다.
원효는 신라 금당십성으로 알려진 것 외에도 신라 불교 대중화를 이룩한 시대를 초월한 성인으로 이미 유명한 인물이다. 원효는 삼국유사에서도 여러 장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삼국사기 등 역사기록 곳곳에 등장한다.

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얻은 깨달음의 과정, 요석공주와의 만남과 설총을 낳은 이야기, 기림사 설립과 혈사에서의 죽음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도술을 부리는 수준의 깨달음을 얻어 신의 경지에 이른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전한다. 오어사의 이름이 지어진 배경이 된 혜공과의 신화 같은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반면 사파 또는 사복 등으로 불리는 인물은 신라십성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삼국유사 4편 의해 ‘사복이 말하지 않다’에서 원효와 함께 잠깐 언급되는 외에는 기록이 없다.

이번 호에서는 원효와 사파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고, 원효에 대한 이야기는 제4편을 소개하는 장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신라 흥륜사 금당십성으로 그려져 있던 사파의 초상을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 그려두고 있다.
◆삼국유사: 사복이 말하지 않다

서울(경주) 만선북리에 과부가 있었는데 남편도 없이 아이를 잉태해 낳았다. 아이는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을 하지 않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때문에 사동 또는 사복 또는 사파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에 있었는데, 원효가 그를 맞으면서 예를 갖추었다.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그대와 내가 예전에 암소에 불경을 실었는데 지금 죽어버렸으니 함께 가서 장사를 치르자”고 했다.

원효가 “좋소”라 대답하고 함께 사복의 집에 이르렀다. 원효가 시체 앞에 나아가 “나지 말라 죽는 것이 고통이니라, 죽지 말라 나는 것이 고통이니라”고 하자 사복이 “말이 번거롭다”고 했다. 원효가 다시 “죽고 나는 것이 고통이다”고 했다.

둘이서 시신을 메고 활리산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원효가 “지혜의 호랑이를 지혜의 숲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소”라고 했다. 사복이 “옛날 석가모니불께서는 사라수 사이에 열반에 드셨는데 지금 역시도 그와 같은 이가 있으니 연호장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오”라 답했다.

원효가 입적했다는 혈사가 위치해 있다고 주장하는 골굴사 산문 전경.
사복이 말을 마치고 풀을 뽑으니 아래에 세계가 생겨났다. 휘황찬란하고 깨끗하면서도 칠보로 장식한 난간과 누각이 장엄해 분명히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들어가니 그 땅이 갑자기 합쳐졌다. 원효는 이에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도량사라고 했다. 매년 3월14일에 점찰회를 행하는 것을 항규료 삼았다. 사복의 교화는 오로지 이것을 보여 준 것뿐인데 세간에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돈다.

찬한다. “깊이 잠든 용을 어찌 등한시하리/ 떠날 때 읊은 한 곡 간단도 하다/ 고통스런 생사는 원래 고통이 아니니/ 연화장에 떠도는 세계가 넓기도 하다.”

원효가 기림정사와 임정사에서 앞 글자를 따와 창건했다는 기림사의 대적광전. 보물 제83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신라십성 원효와 사파

-원효는 7세기에 활약한 승려로 출가 이후 환속해 무애행을 통한 정토신앙 확산에 힘쓴 인물이다. 속성은 설씨이고, 어렸을 때는 서당, 신당이라는 이름이 있다.

파계하고 환속한 뒤에는 소성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효라는 법명은 새벽이라는 뜻으로 불교를 빛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스스로 지었다.

원효는 15세에 출가,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 태어난 곳에 사라사를 세웠다. 낭지와 혜공, 보덕 등의 선승들에게서 불법을 배우며 스스로 깨우치기 위한 고행을 했다. 한국불교사상 발달에 크게 기여해 해동보살, 해동종주라고도 불린다.

고려 숙종이 대성화쟁국사 시호를 내려 지금도 분황사 터에 대성화쟁국사비를 건립했던 대좌가 남아 있다.

문무왕 시대 661년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당항성에서 깨달음을 얻어 돌아와 분황사에 주석하며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등의 100여 종 24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함월산 기림사 산문.
박으로 무애를 만들어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설파했다. 누구나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쳐 백성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다.

고선사에 머물며 참선을 하기도 했다. 기림사를 창건해 머물다 혈사에서 686년 신문왕 6년 70세 일기로 입적했다. 아들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했다.

발생과 소멸, 이것들이 하나이면서도 둘이며 둘이면서도 하나의 관계에 있다. 이는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 어떠한 실재도 없다는 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다. 원효의 사상은 중국의 법장과 징관 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기림사 5종수 중에서 단맛이 나며 마시면 기골이 장대해지고 힘이 생기는 장군수를 일제강점기에 석탑으로 샘을 막았다고 전한다. 고요한 밤 석탑에 귀를 대어보면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사파: 신라 왕경의 흥륜사 금당에 소상으로 모셔진 10명의 성인 중 하나다. 사복으로도 불렸다. 사복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원효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7세기에 활약한 인물로 추정된다.

동국이상국집 23권 남행월일기에 사복은 원효의 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진영이 원효와 진표의 진영과 함께 소래사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유명 승려로 분석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효가 전생에서 사파를 만나다

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깨달음을 얻어 다시 신라로 돌아온 이후 전국을 떠돌며 고행의 길을 걸었다. 걸인의 행색으로 동냥을 얻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으며 농사일을 거들며 끼니를 얻어먹는 일꾼의 일도 줄곧 했다.

대정광전 맞은편과 오른쪽에는 응진전과 진남루. 석탑 옆의 나무는 장군수 영향으로 50여 년 수령이지만 200여 년의 수령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설악산 큰 절에서 땔나무를 베어오고, 부엌의 일을 거드는 불목하니로 일을 하기도 했다. 원효가 강원도 어느 절에서 불목하니로 있을 때였다. 강원도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절에서는 민가와 마찬가지로 겨울에 땔 나무를 늦가을에 이미 산더미처럼 쌓아두어야 한다.

그런데 그 절에 미리 불목하니로 들어와 일을 하고 있던 황소고집으로 소문 난 사복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사복은 어릴 때부터 왼쪽 팔과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불구였지만 힘이 장사이고 고집이 남달라 자신의 일을 거들어주는 것도 싫어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그의 일에는 간섭을 하려하지 않았다.

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해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물을 길어올 때면 물동이의 절반이 출렁거리며 넘쳐 다른 사람들이 다섯 번 길어오면 될 일을 사복은 열 번은 왕복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사복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말없이 혼자 해내었다.

원효가 불목하니로 들어왔을 때, 사복은 심하게 그를 구박했다. 이전에 하지 않았던 불손한 언행으로 원효를 부려먹었다. 그가 불문율처럼 행하던 물 긷는 작업과 땔 나무 베는 일도 대부분 원효에게 시켰다. 원효는 말없이 사복이 시키는 일을 해냈다. 그러고 잠자리에 들면서 늦도록 불법의 이치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

원효가 주석하며 100여 종 24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는 분황사 구역.
고집쟁이 장애인 불목하니로 관심 밖에 있던 사복은 의외로 불법에 대한 공부가 깊었다. 그의 선문답 같은 질문에 가끔 공양시간에 만나는 주지스님도 당황해 했지만 사복의 불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차츰 원효와 죽이 맞은 사복은 겨울철 땔 나무를 준비하는 작업에도 원효와 함께 하길 즐겨했다. 아침 공양을 마친 사복은 여느 때처럼 원효를 불러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가까운 산에서는 장작을 마련할 마땅한 나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땔 나무를 실어 날랐지만 이골이 난 사복과 원효는 매일 수레 가득 나무를 실어왔다.

늦가을 어느 날 때 이른 눈이 내린 길에 수레가 계곡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사복과 원효가 매달렸지만 속수무책으로 열길 낭떠러지로 함께 떨어져버렸다. 원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사복의 배를 뚫고 나온 썩은 대나무 줄기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드디어 극락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구나. 다음 생에 또 만나세”라는 말을 남기며 사복은 웃음을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원효는 사복의 미소 띤 죽음에서 또 깨달음을 얻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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