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70) 흥륜사 금당십성-염촉과 의상

발행일 2020-07-06 09:24:12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신라 불교 공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염촉, 당나라에서도 인정받은 의상 신라에 화엄사상 퍼뜨려

의상대사가 문무왕 때 창건한 영주 부석사 전경. 국보 17호와 18호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전과 석등. 부석사는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신라 역사는 불교의 발전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교가 성했다. 신라는 불국토였다는 말 또한 역사기록 곳곳에 나타난다. 불교의 나라를 상징하듯 신라시대 고승들의 활약이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신라 고승들 중에서도 흥륜사 금당벽화에 그려진 10명의 신라 유명 승려를 신라십성이라 부른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염촉 이차돈, 도력으로 설화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혜숙·안함, 중국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의상 등은 동쪽 벽에 그려져 있었다.

경덕왕 때에 천계를 왕래했던 표훈, 뱀처럼 기어 다녔다는 사파, 대중 불교의 효시를 이룬 원효, 삼태기를 지고 술과 춤을 좋아해 부궤화상으로 불렸던 혜공, 당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신라의 재상 무림공의 아들 자장 등은 서쪽 벽에 그려져 있었다.

이번 호에서는 염촉 이차돈과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부석사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보물 제255호로 지정된 당간지주.
◆신라의 고승: 염촉과 의상

-염촉은 불교의 황무지였던 신라에 목숨을 던져 불교의 씨앗을 심은 인물로 이차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에서 법흥왕 이전에는 불교를 신봉하려면 몰래 섬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보다 무려 155년 뒤인 527년에 신라의 하급관리였던 이차돈이 불교 공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법흥왕은 그의 마음을 가상히 여겼다. 왕은 이차돈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는 말을 받아들였다.

왕의 명령을 받고 형리가 이차돈의 머리를 베자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 이차돈은 순교의 흰 꽃이었다. 잘린 머리가 날아가 경주의 북쪽 산에 떨어져 거기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 순교의 거룩함을 기리는 일이 쌓여갈수록 신라의 불교는 꽃을 피웠고, 꽃 피는 불교에 따라 신라 또한 큰 나라로 발전해 갔다.

보물 제249호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의 삼층석탑.
신라의 불교는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라의 역사야말로 불교를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찬란한 신라의 문화는 불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치체제의 안정도 불교를 통해 이룩되었다. 쉽게 얻은 것은 귀한 줄을 모른다. 어렵게 손에 쥔 보물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고 새로운 보물을 만들어낸다. 신라에 불교가 그런 것이었다.

신라 불교가 이렇듯 특별한 길을 걷게 된 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가 이차돈일 것이다. 불교 없이 신라가 이룩되기 어려웠다면 이차돈 없이 불교 또한 이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차돈의 할아버지 아진찬 종(宗)은 습보갈문왕의 아들이었다. 아진찬이라면 신라 17관직 가운데 4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이다. 이차돈의 집안이 왕족이라는 설명이다.

경주 동리목월문학관 맞은 편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 전시돼 있는 의상대사 초상.
-의상의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의상의 한자 표기가 義湘으로 되어 있지만 義相이나 義想으로 기록돼 있는 문헌도 있다. 625년(진평왕 47년) 경주에서 태어나 선덕여왕 때 644년 황복사에서 출가해 승려가 됐다.

650년 원효와 함께 현장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당시 고구려 땅)에서 첩자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661년(문무왕 원년)에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양주에 머무르다가 이듬해부터 종남산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선사에게서 화엄사상을 배웠다. 668년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했다.

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됐고, 신라 하대에는 전국 곳곳에 화엄종 사찰이 세워졌다. 부석사, 비마라사, 해인사, 옥천사, 범어사, 화엄사, 보원사, 갑사, 국신사, 청담사 등을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로 이름이 높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도적떼들이 나타나자 선묘낭자가 큰 바위를 들어 물리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땅 위에 떠 있다고 해 부석이라 부른다.
의상의 제자인 표훈에게 화엄사상을 배운 김대성이 화엄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남아 있다.

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고려 숙종이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의 전기와 함께 낙산사, 부석사 등의 창건과 관련된 여러 개의 설화가 전해진다. 중국의 송나라 때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도 의상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 경남 거창 우두산의 의상봉이나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의상대 등의 명칭은 의상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바로 불성의 드러남이라는 화엄사상에 기초해 현세 중심의 정토사상을 확립했다. 이를 기초로 현실 세계에 정토의 이상 세계를 구현하려는 불국토 사상은 신라의 문화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불국토 사상은 외래 종교인 불교를 토착화하고, 불교가 통일 이후의 현실에서 사회 통합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영주 부석사 뒤편에 마련된 산신각 선묘각에 그려진 의상의 귀국을 안내하는 선묘도.
◆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의 여인

의상은 왕족이었다. 관리의 아들로 건장한 체격과 부티 나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어릴 때부터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의상은 재주 또한 뛰어나 딸을 가진 귀족들로부터도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의상은 세상의 이치와 삶의 근원과 같은 삶의 화두를 해소하는 철학적 고민에 깊이 빠져 19세에 불가에 귀의했다.

의상은 불교의 진리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다. 처음 원효와 유학의 길에 나섰다가 고구려에서 첩자로 오인돼 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돌아와야 했다. 다음 당나라 사신이 귀국할 때 그를 길잡이 삼아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의상의 유학길은 신라의 많은 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는 한을 남겼다. 남몰래 눈물로 옷고름을 적시는 여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를 동경했던 여인들은 요즘 아이돌을 바라보는 10대 열혈 팬과 같았다. 그렇지만 의상은 훌훌 털고 당나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선묘각에 그려진 의상의 귀국도.
의상의 유학길에 따라 나선 열혈 팬이 있었다. 대신의 딸 선묘 낭자는 오매불망 사랑하던 의상을 그대로 보낼 수 없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남장을 하고, 의상의 뒤를 따라나섰다. 천리 타국에서 공부하게 될 의상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를 따라나선 것이다.

의상이 당나라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선묘는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서안에 들어선 날 선묘는 드디어 의상 앞에 나섰다. 아무도 인기척이 없는 시간을 틈타 선묘는 “서라벌에서 따라나선 선묘라 합니다. 서방님께서는 아무런 염려하지 마시고 공부에 전념하십시오. 제가 뒷수발을 들겠습니다”라며 그의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

의상은 너무나 간절한 선묘의 청과 정성에 차마 떨치지 못하고 반승낙을 하고 말았다. 선묘는 그날부터 인정받은 의상의 그림자가 되어 살뜰히 보살피기 시작했다. 의복은 물론 신발까지 흙 하나 묻어있지 않도록 살폈다. 의상이 공부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그림자처럼 붙어 수발을 드는 바람에 의상조차도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게 공부에 전념하게 됐다.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 걸린 신라십성 중의 신라에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염촉, 이차돈의 초상.
의상은 드디어 당나라 조정에서도 인정을 받는 인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당나라 최고의 승려로 인정받던 지엄의 수제자가 됐다.

의상은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아 신라로 귀국했다. 선묘가 의상의 보양을 위해 소림사로 약재를 구하러 간 사이에 신라 조정에서 보낸 배는 의상을 태우고 돛을 올리고 신라로 출항했다.

천만리 이국땅에 버려진 선묘는 멀어지는 의상의 배를 향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선묘의 정성을 진작 알고 있던 동해용왕은 선묘에게 신비한 힘을 불어넣어 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용왕의 힘을 얻은 선묘는 의상의 수호신이 되어 부석사에 불교를 널리 알리는 터를 마련하고, 그가 입적할 때까지 돌보는 바위가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